광고2012.10.23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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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Seminar



“포스트-2007 시대와 한국 개신교의 미래”


(Post-2007 Era & the Future of Korean Protestantism)




한국 개신교는 숫적으로는 성장 침체를 겪고 있고,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거의 얻지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내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합의된 입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 어떤 대안이 필요하며,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실종되어 있습니다. 


이 세미나는 개신교의 최근 30년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시효를 상실하였는지,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될지를 내다보는 논의의 장을 제공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곧 출판될 책의 초고를 바탕으로 저자의 강연과 난상토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Boston
10월 25일(목) 저녁 7:00-9:00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Jenks Library 212호@ Gordon College (3 min from GCTS)

10월 26일(금) 오후 2:00-4:00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B19 & Hartmann Room (B23)


LA
10월 30일(화) 오전 10:00-12:00 Fuller Theological Seminary 
Payton Hall




강연자: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영국 Trinity College, Bristol(신학 BA)와 London School of Theology(신학 MA)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월간 <복음과상황> 편집장 및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한동대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7년간 강의했다.


다양한 기독교 및 일반 매체에 인터뷰 및 기사를 기고하고 있으며, 랍 벨(Rob Bell)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까지, 톰 라이트(N.T. wright)에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en)까지 ‘복음주의’ 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Posted by erasmus
리뷰2012.07.24 11:37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회가 드디어 해외로 진출합니다. 첫 해외 강연회 장소는 세계의 중심도시, 뉴욕입니다. 이번 'Talks in New York' 강연회에는 뉴욕을 무대로 한국인의 긍지와 위상을 높이고 있는 멋진 분들이 강연에 나섭니다. 우선 201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 후보까지 오른 세계적인 물리학자 김필립 교수, 한인들의 인권과 정치참여운동가이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한인 인맥으로도 유명한 김동석 소장,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프로듀서이자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활약중인 이승재 대표, 135cm의 거인이자 지난 6일 국민훈장 목련장의 주인공이 된,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뉴욕주에서 커뮤니티 매핑으로 이름을 날리고 계신 임완수 박사, 그리고 세바시 스타 김창옥 교수까지, 정말 멋진 분들이 뉴욕특집 강연회의 강연진으로 출연합니다. 7월 19일 목요일 오후 8시(뉴욕 현지 시간) 뉴욕 롱아일랜드 아름다운교회! 뉴욕 거주 교민들 혹은 그 기간에 뉴욕을 방문하는 세바시 팬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김필립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교수) : 새로운 물질을 찾아서

지난 세기, 인류는 원자의 발견과 양자물리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 삶을 바꾸는 새로운 물질들을 찾아낸 바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 뒤에는 과학자들의 쉼없는 노력에서 탄생한 물질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 강연에서는 과학자들이 새로운 물질을 찾기 위한 여러 노력을 탄소 나노 물질의 합성과 그 성질에 관한 연구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승재 (LJ필름 대표) :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영화제로 가는 길

베니스, 베를린 그리고 칸 영화제 등 유럽의 영화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카데미 영화제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아주 먼 영화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단 한 편의 한국영화도 아카데미 영화제에 진출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영화의 역사도 이제 한 세기를 넘어섰습니다. 이웃 일본은 두 번씩이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초대 받은 바 있는데요, 왜 한국영화는 지난 100년이 넘도록 그렇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와 전망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동석 (뉴욕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 시민의 정치참여가 세상을 바꿉니다-미주 한인 사례를 중심으로   

일본군강제종군위안부결의안이 2007년 7월 30일 미 연방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습니다.꼭 5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마이크 혼다 의원은 이 결의안의 통과는 한인들의 모범적인 정치적 결집이 이뤄낸 성과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중심으로 미국의 한인들의 정치참여와 권리신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김해영 (국제사회복지사) : 134cm로 쏘아올린 희망

저는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아버지의 실수로 척추장애인이 됐고, 초등학교 때 어머니의 학대를 이기지 못해 무작정 가출했습니다. 가난과 장애를 가진 134cm의 소녀에게 세상은 거대한 암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30년 후, 저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직업학교에서 14년간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곳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장애까지 가진 저를 용서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인정할 때, 세상은 나의 가장 부족한 점에 가치를 매겨줍니다. 그것을 확인시켜준 곳이 바로, 뉴욕입니다.  

 

 

 

임완수 (버티시스 대표) : 세상을 바꾸는 지도 만들기 

“세상을 바꾸는 지도 만들기” 라는 제목을 보면 무언가 세상의 지도를 그리면서 누군가 세상 땅 따먹기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지도 만들기'란 지역사회의 주민들이나 학생들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함께 지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서로 배우고 소통하면서 그 지역을 더 낫게 변화시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뉴저지에 있는 고등학생들, 그리고 우리나라 전라도 무주에 있는 고등학생, 또 서울에 있는 고등학생들,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이 커뮤니티 매핑을 통해 어떻게 소통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지, 그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김창옥 (김창옥퍼포먼스트레이닝연구소 소장) : 사랑한다면 떠나보라

제가 집을 처음 떠나 본 것은 바로 군 복무를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섬을 떠나야 섬이 보인다는 말처럼, 집을 떠나보니 비로소 가족이 보였습니다. 특히 어머니와 제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한번은 떠나봐야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자신도 마찬가집니다. 이번 강연은 제 가족과 삶을 조금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경험과 깨달음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공동기획 : CBS, 청어람아카데미



2012년 7월 19일(목) PM 8:00


뉴욕 롱아일랜드 아름다운교회


Tel. (516)349-5559

Add. 1 Arumdaun St., Bethpage, NY 11714

http://www.arumdaunchurch.org/




강연회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멘넷 기사 "세바시 뉴욕 녹화"



Posted by erasmus
리뷰2012.05.31 03:30






세바시 처음 시작하면서는 아무래도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일종의 품앗이를 한 셈이지요. 좋은 내용을 갖고 있는 강연자를 처음부터 섭외하기란 쉽지 않는 일이었고, 지명도 높다는 분들은 새롭게 생긴 프로그램에 달랑 15분 출연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섭외과정에서 PD는 그런 설움을 꽤나 많이 당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멀리 보는 안목이 짧은 분들이었으니, 이제는 한다해도 안 시켜주렵니다.^^


청어람 네트워크 안에 있는 분들을 가끔씩 선을 보였는데, 아래의 세 분은 매우 재미있는 강의로 멋진 무대를 꾸며준 분들입니다. 



1. "가족신문이 가져온 조용한 혁명"



가족신문이 가져온 조용한 혁명. 지금은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인 중국사 전공 조영헌 교수의 '28년 가족신문 발간사'가 대하드라마로 펼쳐집니다. 이 강연은 당시로서는 블록버스터급의 사전 준비과정을 거쳤습니다. 보시면 무대에 등장하는 소품이 장난이 아니고, 과거 방송 동영상까지 찾아내는 등 보통 정성과 수고를 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는 대박이었습니다. 조영헌 교수의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강연과 더불어 거의 30년간 모은 자료에 모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신문을 만드는 작업이 결국은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걷게한 대목에서는 공부한다는 것이 어떤 동기부여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도 있었습니다. 가정교육의 측면에서, 역사성의 측면에서,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이 강연은 참으로 다채롭고, 풍성한 시간이었습니다. 필히 보기를 청합니다.   



2. "시간은 결코 관리되지 않는다"



'시간 관리' 카테고리로 묶이는 강의에서 "시간은 결코 관리되지 않는다"는 독특한 통찰로 삶의 의미를 엮어내는 '카이로스'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을 흥미진진, 재기발랄 하게 전달한 강연이었습니다. 아주 가깝게 지내는 선배이고, 여러면에서 재능이 많은 분인데, 난데없이 시간관리 책을 쓰셔서 궁금했었습니다. 이 강의를 보시면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 속에서 우리가 희생하는 것은 무엇이며, 결국 우리는 시간을 갖고 무얼해야 마땅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종 성경도 인용하고, 교회생활도 사례로 등장하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잔잔히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좋은 강연이지요. 



3.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노래꾼 홍순관을 알아온지는 벌써 십수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람을 왜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그의 노래는 노랫말과 가락, 그리고 이를 담아내는 공연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하나의 '홍순관 류'라고 할 어떤 감성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그의 노래는 그런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때로 한 없이 천진난만하다가도, 때로 한 없이 호된 일깨움이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한과 신명이 둘이 아닌 그런 노래를 만들 줄도 알고, 부를 줄도 아는 이란 얘기이지요. 그를 무대로 불러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강연이었습니다.





Posted by erasmus
광고2012.04.18 03:16




“디아스포라+복음주의를 말한다”


일시: 2012년 4월 23일(월) 저녁 6시 - 9 시 20분
장소: Wesley Theological Seminary (4500 Massachusetts Ave., NW Washington, DC 20016)
참가비: 10불 (저녁식사 및 자료집 포함)
주최: WTS International Relations, 코리안 디아스포라 리더십센터, 청어람 아카데미

*참가신청(RSVP) 및 문의: 301-919-9658 (페이스북 이벤트 페이지로 신청)


양희송 발제원고: "한국복음주의의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일정(Schedule)

6:00 – 7:00 저녁식사 및 교제
7:00 – 7:10 소개
7:10 – 7:50 한국 복음주의 –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 양희송 대표 (청어람)
7:50 – 8:00 Coffee Break
8:00 – 8:40 디아스포라 복음주의 / 안상현 목사 (코스타) 
8:40 – 9:10 패널토의 / 양희송 대표, 안상현 목사, 황지성 박사 (사회: 김경수 목사)
9:10 – 9:20 광고 및 폐회



Posted by erasmus
리뷰2012.03.28 05:48



청어람아카데미는 CBS TV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강연회를 공동기획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6개월여만에 100여명의 강연자들이 무대에 서서 저마다 15분간 열강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청어람아카데미와 직접적 인연이 있는 분들의 강연만 모아보았습니다. 


1. "세계를 정복하려면 지도를 사라"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2. "197만원으로 여섯식구가 즐겁고 정의롭게 사는 법" 박총(복음과상황 편집장)






3. "영화가 죽었다 깨어나도 연극을 못 따라오는 3가지 이유" 박준용 (ADZERO 대표)






4. "헌법 제1조를 읽는 세가지 방식"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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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주의2012.03.28 05:05

* 2012년 3월 26일(월) 제3회 청어람 청년사역컨퍼런스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미래"(http://bluezine.tistory.com/551)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컨퍼런스 및 전체 발제문을 담은 자료집을 구하시려면, 청어람아카데미(http://www.bluelog.kr, 02-319-5600)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국 복음주의”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0. 서론

한국 복음주의는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는 주제다. 복음주의자들은 지난 30년간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괄목할 성장을 보여주었으나,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자기성찰적 논의를 제대로 담고 있는 표준적인 책 한 권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이 주제가 제대로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복음주의 일반에 대한 논의가 정돈되지 않았다. 사용하는 개념, 역사, 쟁점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고 제각각이다. 이런 현상이 무리가 아닌 것이 주요 신학교 중에도 복음주의를 독자적인 주제로 연구하고 폭넓게 가르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어느 과목에 끼어서 배우냐에 따라, 복음주의 이해는 큰 폭으로 달라진다. 오히려, 최근에는 종교사회학 연구자들의 사회학적 관심이 두드러지는 형편이다. 또한 대중들 사이에는 이 용어의 용법이 내부적으로 충분히 심화되기 전에 언론에서 먼저 무분별하게 유통되면서 발생한 개념의 혼란도 적지 않다.

둘째, 개론적 이해도 정착이 안되어 있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국 복음주의란 특정한 조건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논의이다. 여기에는 단지 이식된 외국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보수정치와의 관련성에서 주목하는 일반언론의 입장과 교회의 부흥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목회자들의 논의 수위와 관심 주제는 큰 폭으로 달라질 것인데, 어느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참고할 영역과 주된 쟁점은 확연히 다르다. 한국 사회와 역사의 맥락 위에서 복음주의를 논하려면, 끌어들여야 할 국내외의 다양한 논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활용해야 한다.

셋째, 이 논의가 복음주의 운동 전반에 적용되는 연결고리가 취약하다. 흔히 논쟁하는 주체실천하는 주체가 괴리되는 현상인데, 이 둘의 사이를 극적으로 좁힐 전략, 즉 이론의 실천 전략이 필요하다. 논쟁주체가 대대적인 운동의 주체가 되거나, 실천가들이 열심히 연구하는 모드로 바뀌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양자간의 긴밀한 역할분담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관찰과 분석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재 진행형의 운동을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는 그런 비판적 거리가 쉽사리 확보되지 않는다. 결국은 운동가들이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자임하면서 자기 실현적 전망을 내어놓게 된다. 지금은 복음주의 운동의 실천 전략이 매우 긴히 필요한 시기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고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전진을 위해 꼭 필요한 주제를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좋은 설득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꼽은 것이다. 사람이 어떤 주장에 설득되려면, 그것이 머리로 납득이 되어야 하고, 가슴으로 공감이 되어야 하고, 주장하는 이를 신뢰할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복음주의는 설득력이 있는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를 마땅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1. 복음주의의 로고스

 1) 기본적으로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의외로 단순할 것 같은 이 질문에 단순하게 답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이란 용어 자체가 몇 개의 층위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용어의 성경적 기원을 파고들자면, 먼저 성경에서 복음(good news, Gk euangelion)이란 용어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 지를 파악하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그 포괄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1] 역사적 기원을 파고들면, 16세기의 종교개혁 시기 전후로 등장하는 복음적(Fr. evangelique, Ger. evangelische)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이들(John Wycliffe, Martin Luther, etc.)이 공유한 특징을 주목하게 된다. 이들이 보여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관, 회심의 중요성, 그리고 이런 신념에 대한 즉각적 결단과 헌신을 중요하게 생각한 태도 등이 두드러진다. 또한, 18세기의 영미 대부흥운동과 유럽의 경건주의 전통 등이 공유하고 있었던 성경공부, 기도, 전도에 대한 열정적 태도 등도 중요한 특징으로 꼽힌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18세기 이래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지칭한 이들이 존재해왔다. 이들은 20세기 초반, 바깥으로는 서구 사회에 팽배한 세속주의(secularism)에 대해 반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신학적 자유주의(liberalism)와 혹은 신학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 갈등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적 입지를 형성해 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그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급속히 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이들과 유사한 신앙태도를 갖고 있는 이들간에 국제적 연대의 장도 넓게 열려있다. 21세기 초 현재 이 흐름은 세계적으로 가장 활력이 있는 기독교 현상으로 포착된다. 우리는 이 흐름을 복음주의(evangelicalism) 혹은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이렇게 깔끔하게 정돈되는 것만은 아니다. 유사한 용어를 쓰지만 지역적으로 편차가 있다. 독일에서 Evangelische Kirche 란 종교개혁 시기의 용법에 따라 단순히 개신교, 혹은 루터파 교회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독일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복음주의라고 할 때, 단순히 개신교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미권에서 복음주의는 개신교 전통에서도 18세기적 부흥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에서 선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복음주의자는 존 웨슬리의 후예(Holiness 전통)라고 보거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후예(Calvinist)라고 본다. 이 양자는 예정교리 등의 쟁점을 놓고 입장 차이가 첨예한데, 상대를 복음주의자로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다면 복음주의를 좀 열등한 하위개념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경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중반에 격렬했던 근본주의 논란의 영향력이 충분히 가신 것은 아니어서, 성경무오설, 창조과학론을 둘러싼 논쟁구도는 복음주의 이름 아래에서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는 영국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활력있는 대중적인 개신교 신앙 형태로 복음주의를 꼽을 수 있게 되었다. 복음주의는 이제 그 발생기원적 한계도 넘어서 오순절주의은사주의와도 신학적, 실천적 교류를 긴밀하게 하고 있고, 로마 카톨릭 교회와도 몇 차례 교리적 연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 이래로 늘 대립적 관계였던 자유주의 노선과는 여전한 긴장이 있지만, 신학적 탐구나 사회정의의 실천이란 측면에서는 상호참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 된 이유를 잘 드러내 준다.[2]

 

2) 복음주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바는, 기존의 논의의 맥락을 최대한 넓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특히, 한국 개신교가 미국 개신교에 매우 의존적으로 형성되어온 점을 감안할 때 미국 상황에 대해서는 이제는 일방적 소개보다는 비판적 검토를 수행해줄 이들이 필요하다. 동시에 거의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영국 복음주의 전통을 좀더 잘 소개하는 작업이나, 역사적으로 복음주의 범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최근 들어 점점 더 상호참조의 폭이 커지고 있는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전통이나, 성령운동(charismatic movement) 흐름들을 적절히 논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다. 아울러 동아시아권에서 가장 개신교가 활발한 한국이 단지 안팎으로 수적 증가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함께 국제적으로 복음주의 운동을 형성해가는 역할(evangelicalism in the making)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느덧 다수파가 되어 버린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정의와 사회적 변화에 대해 갖는 관심의 비중과 내용도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3]

 

이는 결국 이 모든 과제를 감당할 주체인 한국 복음주의가 누구인가를 규명하는 작업과 뗄 수 없는 일이 된다. 결국 복음주의의 개념규정은 이런 해석학적 순환 바깥이 아니라, 그 내부로 개입해서 자신을 그 일부분으로 삼아, 돌아가는 논의를 평가하고, 대안을 내어놓고, 숨은 전제가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노출하면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산출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4]

 

오랫동안 복음주의 논의를 책과 현장에서 참여관찰을 해온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 하자면, 한국 복음주의는 60년대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소개된 서구 복음주의 운동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형성된 대중적 신앙운동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복음주의를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 그 자체로 바로 소급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개신교 선교의 주된 흐름이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운동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는 결국 교단의 형성으로 귀착됨으로써 초교파적(transdenominational) 특성을 전면적으로 발휘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후의 한국교회사에서 보듯 주요 교단에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적 성향이 깔려 있는 것은 두고두고 복음주의 운동에 친화적인 조건을 제공해주기는 했으나 이것은 교단정치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5] 70년대까지 교회 내에서 주요한 대립구도는 보수 대 진보 혹은 보수주의 대 자유주의란 용어로 설명되었지 복음주의란 용어는 성결교 등 일부 교단을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복음주의란 용어가 빌리 그래함 등의 활동으로 중심으로 2차 대전 이후 등장해서 70년대 중반에 크게 주목 받기까지는, 한국의 교단교회 상황에서 논의 구도와 내용은 미국의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 구도를 그대로 닮아 있다.

 

3) 1960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대학생선교단체를 한국 복음주의의 직접적인 시초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우선 이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전형적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빗 베빙턴이 정리한 유명한 복음주의의 4가지 특성행동주의(activism), 성경주의(Biblicism), 회심주의(conversionism), 그리스도중심주의(Christo-centrism)는 주요 단체인 IVF(56), CCC(58), UBF(61)의 활동에 초기부터 잘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가끔 대형 전도집회나 행사를 위해 교단교회와 협력하기도 했으나, 80년대 중반까지는 긴장관계였다. 지역교회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예배를 갖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6],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들끼리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도 당시에는 매우 위험스럽게 보였다. 선교단체들은 교회의 신앙훈련을 매우 열등하거나 잘해야 희석된 것으로 보았고, 교회는 그런 선교단체를 목회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가끔 이단 시비가 일기도 했고, 종종 선교단체의 리더십 구조는 권력남용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7] 그러나, 80년대에 이미 매년 여름에 열리는 각 선교단체의 수련회 참석인원은 도합 수만 명에 이르렀고,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들이 이런 방식으로 어울리고 흩어지고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형성되는 역동성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대형집회와 대형 수련회,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경험한 신앙적 태도는 당시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력한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고 유통하는 통로가 되었다. 또한,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선교단체 출신의 목회자들이 이런 훈련과정을 지역교회에 적절히 이식하였고, 선교단체를 경험한 대중들의 교회 유입이 충분히 축적됨으로써 점차 협력관계로 전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1989년 설립된 학원복음화협의회가 이런 관계의 상징적 기구이자, 실질적 협력구조를 상설적으로 확보하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가시화 되고, 구조화 된다.

 

한국 복음주의 형성에 대학생선교단체만이 기여한 것은 아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 말까지 개신교권의 청년문화는 그들이 부르고 듣던 노래, 친교방식, 기도, 성경공부, 전도, 경건의 시간, 독서 등에서 각각 독특한 스타일(style)을 창출하였고, 이를 위해 사역하는 매우 다양한 단체들(찬양팀, 출판사, 잡지 등)이 등장했다. 이들을 통해 제공된 다양한 삶의 지침들은 안팎을 명료하게 가르는 정체성의 경계를 형성하였는데, 스타일은 대체로 자생적이었기 보다는 수입된 것이었다. 90년대 초반 한국사회가 대중문화의 폭발을 경험하면서, 급속도로 세계화 시대로 접어드는 가운데 복음주의 대학생단체와 교회 청년부에서 유통되던 하위문화(subculture)는 한편으로는 당시의 한국사회의 대중문화와 달랐다는 점에서 공간적 구별짓기 측면과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사회 일반의 흐름보다 일찍 서구 문화를 내면화하였다는 면에서의 시간적 구별짓기가 가능했다는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또한 90년대 초반 이래로 시작된 해외선교 열풍은 단기선교란 이름으로 상당히 많은 청년들에게 해외경험을 제공하였고, 이 역시 당시 사회에서는 선도적인 것이었다.

 

결국, 한국복음주의는 직접적으로는 대학생선교단체와 이들과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교회, 학교 등을 통해 길러지고, 그들이 호흡한 기독교 대중문화, 출판, 선교활동 등이 그들의 세계관(worldview)를 구성하게 된 대중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이런 이들이 주로 모이는 중대형교회들이 등장하면서 숫적으로 규모가 커졌고, 이들이 누리던 문화나 라이프스타일이 한국 개신교 전반에 파급되면서 이런 복음주의적 정서는 사실상 개신교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교계의 지형도는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여전히 교단과 교파 단위의 구조가 견고하였기에 복음주의 교회로 알려진 목회자들이 정작 교단의 정치구조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미미하기 일쑤였다. 교계의 구조와 대중적 흐름 사이의 괴리 현상은 한국 복음주의를 논할 때, 유의해야 할 지점이다. 단순히 모든 보수적 교회의 행태를 복음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는 없다.

 

4) 이런 흐름 위에서 소위 복음주의 목회자 4인방(이동원, 하용조, 옥한흠, 홍정길)이나, 복음과상황 4인방(김진홍, 홍정길, 이만열, 손봉호) 같은 용어로 묶이는 이들이 활동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초교파주의적 협력이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존 스택하우스 같은 학자는 조지 마스덴을 인용하면서 복음주의를 해명하는데 이를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8] 나는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교회론에 대해서는 유연하다고 말한 것은 피상적 관찰이며, 스택하우스의 이 지적이 더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 복음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교회론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정체성의 주요한 활동을 주로 초교파적 협력의 장을 통해 수행해왔다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에 있어서는 언제나 개별 공동체의 장연합운동의 장이란 이원화된 공간이 중요하게 작동해왔는데, 성공적인 시기는 이 두 공간의 선순환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 선순환이 깨어지면 예외 없이 운동이 기울었다. 복음주의 운동 전반의 성과를 배타적으로 자기 공동체의 성공을 위해 종속시키거나, 반대로, 복음주의 운동을 지지하고 성원해주는 신앙공동체의 대중적 뒷받침 없이는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해 취약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 복음주의의 초교파적 성향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보여준 특징을 묘사한 것일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성, 혹은 필연성을 예측하게 하는 지점이 있다.

 

첫째, 이 초교파주의는 원초적으로 복음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내포하고 있다. 한쪽은 초교파주의를 복음주의 자체의 확장으로 보아 긍정한다. 다른 쪽은 이를 신학적 희석의 결과물로 보아 비판적이다. 영국에서는 1966Evangelical Alliance 총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에서 나와 복음주의자들의 교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로이드 존스의 입장에 존 스토트가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교단이 명시적으로 복음을 거부한 경우가 아니면 교단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며 정면 대립한 사건이 이것과 관련이 있고, 미국에서는 빌리 그래함이 도시 단위의 대규모 전도집회를 위해 자유주의자와 심지어 로마 카톨릭까지 포함하는 준비위를 꾸렸던 일에 반발해 밥 존스를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이 격렬한 비난을 남기고 이탈한 일이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된다.[9] 미국에서는 복음주의 정체성은 성경무오설(biblical inerrancy)대속이론(penal substitution theory)을 그 신학적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영향력이 크다. 이에 반대하는 측은 그 주제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배타적으로 시금석을 삼는 행위는 복음주의의 역사적 궤적과도 맞지 않고, 신학적으로도 과도하게 단순한 논리란 비판을 가한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그간 이런 정체성 논쟁 없이 연합운동의 기조를 잘 발휘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부재가 단순히 신학의 부재 때문이었다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아마 개별적 단위에서는 신학적 정체성을 강화하되, 연합의 장에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일하는 방법을 잘 갖추는 쪽으로 논의가 가야 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둘째, 초교파주의를 중요한 사역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말은 복음주의자들이 종종 교단 정체성에 구속 받는 기관보다, 초교파적 기관과 매체를 설립하는 것을 선호한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준다. 빌리 그래함의 경우, Christianity Today 같은 매체를 창간하였고, 로잔대회 같은 국제적 연대기구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Christian Century, WCC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지만 초교파주의란 기조에서 자신들의 지향에 충실한 매체, 학교, 대형 컨퍼런스 등의 인프라를 갖추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는 점으로도 설명된다.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눈에 띄는데, 우선 두란노서원을 비롯해서 다수의 기독교 출판사들이 단행본과 잡지, 큐티집 등의 출판을 통해 해외의 복음주의 흐름을 소개하고, 이를 내면화 하면서 대중의 관심과 의식을 견인하는 역할을 잘 감당했다. 또한, 연합운동의 영역에서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이제 전세계에서 해외유학생수련회를 개최하고 있는 KOSTA(1986), 대대적인 해외선교운동을 촉발한 해외선교단체와 대학생선교단체의 연합운동인 선교한국(1988), 청년대학생 사역단체와 지역교회의 협의체인 학원복음화협의회(1989) 등은 그 영역이 다를 뿐 이사진을 비롯한 핵심구성원이 거의 그대로 겹친다. 이런 조직은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개별 단체의 산발적인 각개전투로 진행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서로 다른 단체간에 흐름과 정서를 공유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이런 연합기관과 이들의 대중집회는 대중들이 지속적으로 복음주의 운동의 확대재생산에 참여하도록 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90년대 이후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주요한 의제와 문화의 생산과 유통은 이런 연합운동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 전 시기 대학생선교단체의 수련회 등이 만들어내었던 흐름보다 훨씬 초교파적이고, 더 세련되고, 교회와 친화성이 높은 연합운동은 90년대 이래로 대세가 되었다. 각 대학에서 발생한 기독대학생연합운동(기연) 역시 이런 흐름 위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 복음주의 운동이 동력을 잃어가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런 연합운동과 출판 등의 복음주의 생태계가 현저히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량이 떨어진 것이 직접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순환된다.

 

셋째, 초교파주의로 말미암아 생기는 구조적 유혹 역시 있다. 초교파적 연합과 협력은 사실상 참여 단체가 이미 자신의 존재기반과 자생력을 갖추고 있을 때에 상호 상승작용이 생기고, 영향력이 극대화 된다. 그런데 연합운동의 구조가 이를 잘 살리는 경우는 실제로 드물다. 대체로 재정 지원이 유력한 한 두 교회나 개인에 의존하게 될 경우, 장기적으로는 회원의 참여나 관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운영구조가 탄탄하지 못한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영향력을 사유화하려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한국 복음주의권의 여러 연합단체들에서 세대교체의 문제와 더불어 연합운동 자체를 지속할 역동성의 상실 문제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역량은 연합운동의 명분이 자동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연합과 협력은 주어진 미션의 성취를 극대화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런 측면은 복음주의 연합운동이 동적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5) 한국 복음주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면, 나는 이 논의의 주체는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수행한 그룹들과 교회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전히 그 운동에 귀속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복음주의 논의에 관심을 갖고 동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들도 포함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나뱁티스트 전통 등) 아마도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경우는, 전통적으로 복음주의에 귀속감을 갖고 있었으나 이탈하는 그룹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나는 이들을 복음주의에서 이탈한 그룹(ex-evangelical)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주의를 기대하는 그룹(post-evangelical)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나안 성도라는 명칭을 제안하기도 했다.[10]

 

그래서, 한국 복음주의 논의가 포괄해야 할 복음주의자의 범주는 최대한 넓혀 잡는다면, 마치 미국언론들이 그러하듯 보수적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 전부로 볼 수도 있겠으나, 엄밀하게 잡는다면,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나 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한국 복음주의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는 경우를 일차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경계선의 안팎으로 포진되는 개인적으로 귀속감을 갖는 이들 정도가 포함될 것이다. 그러기에, 아마도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는 당연히 복음주의권의 문제로 인식이 되었겠지만, 명성교회 건축 문제는 한국 개신교권 전체의 문제로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다. 기독교 사회책임의 출범과 김진홍 목사의 뉴라이트 운동은 일차적으로 복음주의권이 책임 있게 반응해야 했으나, 기독당은 개신교계 전반이 처리할 일로 여기는 듯하다. 한기총 해체 캠페인은 약간 복합적인데, 그 조직의 구조와 운영은 복음주의권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기총이 복음주의권 교회와 인력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던 와중에 부정선거 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복음주의자들도 연루되는 사안으로 인식이 된 듯하다. 전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좁은 의미의 귀속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전반에서 벌어지는 사안에 자신들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느끼느냐에 따라 대중적 관심을 발휘해 오는 수준도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 언급한 각 사안들에서 사랑의교회의 연관성과 행보가 유난스럽게 두드러진다.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랑의교회가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갖고 있던 상징적 영향력을 이전의 온건한 초교파주의가 아니라, 개교회의 필요에 따라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반사적으로 우려를 갖게 하였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6) 나는 일전에 한국 개신교는 지금 지난 30년간 지속되어온 체제가 변동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보았다.[11] 이를 개신교 87년 체제라고도 했고, 이 시기의 특징이 2007년이란 상징적인 해에 어떻게 드러났었는지를 묘사하기도 했다. 이제 앞으로 우리가 당면한 시대는 그러므로, 포스트-2007 시대라 부를만하다는 제안도 했다. 그 이야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한국 복음주의 논의에서 맞닥뜨릴 과제는 한두 개의 부속품을 수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설계도 전체를 검토해야 하는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혹은 설계자들의 이상 자체를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복음주의의 로고스란 장을 채우는 것은 그런 면에서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작업이고, 여기에는 다종 다양한 이들의 제안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논의는 아마도 단순히 신학을 논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론적 논의가 소용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이론만큼 완고한 이론이 없다.

 

내가 대략 그려보는 그림은 이렇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은 그 자신이 기꺼이 따를 내용을 말해주는 사람들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설교자이든, 저술가이든, 정치가인든, 농사꾼이든, 학자이든, 복음주의자의 삶에 대해 진정성 있게 전달해줄 목소리(voice)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유실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주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언론 매체일수도 있고, 찬찬히 읽어야 할 책을 선별하고 권해주는 출판사이거나 독자운동일수도 있다. 연간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수련회여도 좋고, 매주 만나는 교회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 가야 할 방향을 이를 앙다물고 탐구해 볼 수 있는 학교도 필요할 것 같고, 새롭게 벌어지는 온갖 사안에 대해 정돈된 답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씽크탱크 같은 것이어야 할 것도 같다. 일종의 복음주의 생태계(evangelical ecosystem)가 필요하다. 다들 초대형 공룡만 되려고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그 생태계의 미생물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에게는 이 목소리가 들려지고 있지 않다. 혹은 바람결에 세미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복음주의 논의를 들여다 보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사실은 이 문제가 단지 로고스, 즉 개념과 논리, 신학과 교리만의 문제는 아니란 점이다. 18세기 복음주의가 강고한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를 지나고 나서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신앙(a living faith)의 회복이란 형태로 등장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것을 파토스와 에토스로 구분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복음주의 파토스

1) 파토스(pathos)란 말은 흔히 정서(emotion)으로 옮겨지지만 사실상 고통(suffering)이나 공감(sympathy)이란 의미를 갖는다. 복음주의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단순히 어떤 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파토스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자신과 세상을 포함한 세계의 어떤 측면을 놓고 고통받거나, 분노하거나, 폐부를 찌르는 공감대를 갖고 대하는 그런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고, 신학적이면서도 신앙적인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s), 혹은 극복의 의지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베빙턴의 4가지 특징 역시 일종의 파토스를 깔고 있다. 성경주의란 단순히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정도가 아니라, 종교개혁 이전 시기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틴 루터 등이 자국어로 성경번역을 하거나, 자국어로 설교를 할 때 고취되는 어떤 폭발적이고 저항적인 정서와 관련이 있다. 교황청의 무시무시한 이단심문관의 취조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믿노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시험지에 또박또박 정답을 써넣는 행위라기 보다는 목숨을 값으로 치르고라도 외칠 격정적 신앙고백과 연관이 있다. 회심주의는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웨슬리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회심체험의 긴박성과 무게를 전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의미 값을 갖는다. 그것은 고전적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구령의 열정으로, 혹은 한번도 복음을 들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용납할 수 없는 정의감의 발현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물론, 이런 파토스는 종종 사회를 향해서도 폭발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 윌리엄 윌버포스, 존 웨슬리, 존 뉴턴 등이 자신들의 시대에 노예제도를 향해 갖고 있던 태도 역시 파토스적이었다. 그것은 견딜 수 없이 부당한 것이었다. 웨슬리에게는 탄광 노동자들이 주일에도 일을 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올 수 없어서 교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그는 그 부당함에 맞서 당시로서는 (아마 지금 상황에서도) 혁신적이었던 노상설교를 탄광과 공장노동자들을 상대로 감행했다. 연간 1,000회가 넘는 설교를 했다는 웨슬리를 몰아간 것은 파토스적인 그 무엇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의 행동주의는 그들이 기질상 조증 성향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 자체가 격렬한 파토스를 제공하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이 시대를 향한 기독교적 리더십의 등장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비전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불만과 동시에 가능한 현실에 대한 선명한 이해의 복합체다 (Vision is compounded with a deep dissatisfaction with what is, and a clear grasp of what could be.) 이 비전은 단순한 논리와 명료한 언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파토스와 깊은 연관이 있다. 현실을 가로지르는 불만의 정체를 포착하는 것과 이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런 파토스의 약점도 있다. 쉽게 충동하고, 흥분에 호소하기 쉽다는 것. 무수히 많은 바이블 캠프와 부흥회에서 바로, 지금, 이순간 결단을 재촉하는 부름 앞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다반사가 되면서 신앙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상한 어떤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켜서 결단을 요구하는 논법과 그 절대절명의 목적을 위해서는 약간의 심리적 조작과 유인은 감수될 수 있는 것으로 짐짓 접어두는 경우도 생긴다. 부흥에 대한 갈망은 종종 흥분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 이런 약점 때문에라도 복음주의는 열정과 냉정을 함께 장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가치를 풍성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무감동의 로고스로만 인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적어도 그를 묘사하는 복음서의 기록은 참으로 다이나믹하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교리적 요약으로 함축되지 않는, 길들여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격성은 끊임없는 파토스의 원천이다. 그리스도의 긍휼, 그의 사랑, 그의 분노, 그의 고통, 그의 희생이 성경적 맥락 속에서 더 폭넓게 인식되면 될수록 복음주의적 파토스는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진다.

 

2) 한국 복음주의의 현재 가장 취약한 지점이 파토스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분노가 실종되었고, 정의감이 보이지 않고, 사랑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 한국 복음주의 대중의 가슴을 뒤흔들 어떤 가치나 사건이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지도자들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한국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사실상 교회 키우는 일이었다. 이를 여러 좋은 말로, 제자훈련이라 하거나, Acts 29라거나 했지만, 결국은 교회성장으로 귀결되는 일이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노라고 불을 뿜었으나, 그 결과 초대형교회를 몇 개 갖게 된 것 외에 변한 바가 많지 않다. 적어도 한국사회는 교회 덕에 세상이 더 좋아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교회는 아들 아니면 사위에게 물려주는 것이 대세가 되어 버렸고, 그 성장을 일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은퇴를 위해 거액의 퇴직금을 챙겨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 복음주의의 거대한 에너지를 교회를 키우는 일, 혹은 목회로 다 환원한 셈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파토스를 던져 성취해야 할 어떤 것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들먹거렸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직장을 마련해주고, 퇴직금 주는 일로 그 결국이 끝난다면 그 일은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한다. 교회하나님 나라의 적이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교회를 키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교회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고, 정의를 가져오고, 사랑을 가져오느냐를 매섭게 묻는다. 더 이상 사람들은 가슴이 허전해서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해서 자신의 결핍을 메꾸기 위한 종교적 위로를 찾아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배우고, 시간을 쓰고자 한다. 더 이상 교회는 자기의 덩치를 키우고, 건물과 직원을 유지하는 것으로 존재증명을 하지 못한다. 한국 교회에 언젠가부터 이단과 사이비가 전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언기도나 신비주의적 천국체험 등도 요란스럽게 유통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언제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유독 최근 10년 사이에 두드러져 보인다. 사람들의 파토스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주류 교회들이 대중들과 교감할 파토스를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고, 주된 대화의 내용이 교회 건축이고, 장로 선거이고, 목사-장로 갈등인 상황이니, 그것이 무엇이든 강렬한 파토스를 던지는 이들이 무언가 승기를 잡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3) 한국 복음주의에 한번 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문제를 갖고 과잉된 파토스를 뿜어내는 흥분상태를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고 거대한 문제와 맞서 싸우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신학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투쟁은 그의 전 생애를 걸쳐 비우호적 여론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문제였고, 최종적으로 노예해방을 위해 당시 2천만 파운드의 배상을 국회가 결의해야 했기에 결코 단순히 도덕적 우월감을 누려보겠다는 수준의 동력으로 진행될 수는 없는 사안이었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복음주의 신앙은 정의(justice)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껴안고 씨름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해외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정의의 문제가 과거에 비해 훨씬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복음정의의 맥락에서 풀어내는 것,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사람들은 보고자 한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교회가 고난 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은혜 때문이 아니라, 특혜 때문이라고 본다. 복음주의는 자신들이 믿는 바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파토스를 뿜어내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재규정 되어야 한다.

 

 

3. 복음주의 에토스

1) 에토스(ethos)는 기본적으로 인격(character), 혹은 신뢰성(credibility)과 관련된다. 종종 윤리(ethics)와 관련되는 영역이다. 불행히도 한국 교회 전반의 신뢰도는 땅바닥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기독교인들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계층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진실을 추구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보다는 계급적 이해관계, 정치적 신념, 지역적 연고, 학벌 네트워크에 더 크게 영향 받을 것으로 간주된다. 삶의 일관성(integrity)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

 

한국 교회, 특히 복음주의적 신앙생활의 내용에서 구원을 위해서는 로고스(바른 말, 바른 논리),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파토스(열정)를 꾸준히 강조해왔지만, 에토스(윤리)는 적절한 자리를 부여 받지 못했다. 오직 믿음이란 로고스적 강조는 에토스를 기껏 공로주의 신앙의 결과물 수준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뜨거움을 강조하는 파토스는 일상에서의 에토스보다는 특별한 경험을 절대우위에 놓게 만들었다. 한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일상에서 차분히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행위는 복음주의자의 이상적 모습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모습이었다. 학교나 직장에 충실하거나, 가정을 중시하는 태도는 마땅히 필요한 복음주의적 자기희생에 대한 부정이었다. 당연한 귀결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직업윤리(work ethic)나 가정/가족 윤리(family value)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진공상태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직장과 가정생활에서 풀리지 않는 갈등과 긴장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역에서의 예외적인 성공사례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례로 추앙하거나, 반대로 이 모든 것을 결국 내려놓고 매 순간을 뜨겁게 살아가는 사역자의 삶을 언젠가 선택하면 이 모든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 희망한다. 이런 전형적인 모습이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신실한 복음주의자들의 사고와 행태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식적 지혜를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지 자신들의 선택을 좀더 나은 복음주의 신앙의 토대 위에서 통합하거나 조율하지 못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윤리동성애, 낙태 등의 심각한 논쟁 이슈로는 등장하지만, 자신들의 일상을 규율하는 공유된 삶의 태도로는 거의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종종 윤리적 거대담론을 열정적으로 제기하는 그들이 개인윤리나 집단윤리의 수준에서는 매우 모순되거나 낙후된 모습으로 비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곤 한다.

 

2)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으로 이 부분과 관련이 되는데,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변화가 없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세계관이 누락되어 있다는 진단을 한다. 그간 세계관 논의가 주로 인지적 과제로 여겨졌다면, 이 논의가 일상윤리를 다루는 데에까지 문제의식이 미친 것은 적지 않은 성과라 봐야 할 것이다. 그간 기독교는 한국사회에서 남들보다 좀더 일찍 서구 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는 통로였던 덕택에 사회문화적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이제 그런 특권적 지위가 거의 다 사라진 상황에서, 때로는 교회 내의 문화가 퇴행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윤리는 사실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요소가 적지 않다. 복음주의 공동체가 어떤 에토스를 배양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한국사회가 급하게 달려나가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회문제를 견뎌내면서 이 사회를 지탱해줄 공동체가 많지가 않다.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로 간주되는 종교, 그 중에서도 한국사회에서는 가장 폭넓게 분포하고, 잘 조직된 시민사회에 해당할 개신교가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조율해 나갈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정치적 기능을 요구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개신교가 권력 획득이란 좁은 의미의 정치 과정에서는 한발 빠져 있는 것이 그런 사회적 중재를 수행하는 데에 더 낫다. 최근 몇 년간의 개신교권이 보여준 모습은 정교분리란 헌법적 원칙에 대한 위배를 포함해서 매우 집요한 이익집단으로 행동하면서 매우 저급한 수준의 정치사회 의식을 드러내었다. 경제윤리에 있어서도, 최소한 청교도적 기준, 즉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얻은 부에 대한 인정도 일관성 있게 천명하지 못했고, 불로소득 땀 흘리지 않고 얻은 소득으로 꼽힐 만한 투기적 부, 혹은 탈세 등의 부정한 소득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따끔한 비판세력이 되지 못했다. 복음주의 공동체들은 부와 권력의 문제에 있어서 뚜렷한 대안(alternative) 공동체, 대조(contrast)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3) 에토스가 윤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삶의 태도, 라이프 스타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다원성에 대한 태도, 문화나 예술에 대한 태도 등이 포함된다. 인터넷에서 라이프 스타일로 검색을 하면, 패션, 레저, 여행, 독서, 취미, 운동, 예술, 등 삶의 다양한 측면을 총망라하는 주제어들이 뜬다. 어떻게 소비하는가, 어떻게 자신을 가꾸고 꾸미는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 무엇을 읽고, 어디를 여행하는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가 한 사람의 에토스, 한 집단의 에토스는 그렇게 표현되고 형성된다. 또한, 중요한 의사결정은 어떻게 하는가, 연약한 사람은 어떻게 대하는가, 돈은 어디에 우선적으로 쓰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포함한다. 당연히 이런 면에서의 에토스는 단일하거나 일률적일 수 없다. 여기에는 다양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즐겁게 향유하는 태도가 요구될 것이다. 종종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취향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특정한 유니폼을 입히고, 무엇을 하지 않도록 하거나, 무엇을 하도록 함으로써 집단의식을 쉽게 고취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반대의 길, 즉 자유를 부여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공유하는 에토스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4. 한국 복음주의를 위한 제안

한국 복음주의의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는 제각각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꺼번에 다 있어야 한다. 물론 각 영역에서 주도적으로 기여하는 사람과 조직은 다를 수 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결핍을 이렇게 진단하였다. 이런 진단이 설득력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다음 단계를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여러 면에서 토론되고, 정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나,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지역교회와 개별 신앙공동체의 장을 결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과소평가 하지 말라. 그곳은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모판이 될 수도 있고, 한없는 소모전의 수렁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에 제대로 된 인정과 지지의 연대를 만들지 못하면, 끊임없이 후방이 위협받는다. 그런 곳을 만들던지, 그런 곳을 찾으라.

 

둘째, 연합운동의 장을 소중하게 여기라.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 초교파적 연합운동의 장은 복음주의 운동의 최선의 역량이 발휘되고 유통되어야 하는 장이다. 그곳은 대형집회나 거대 조직이 될 수도 있고, 매우 작은 규모의 실험적 활동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크건 작건 이 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격려 받아야 하고, 좋은 결과들은 선의를 갖고 유통시켜야 한다.

 

셋째, 복음주의 인프라를 구성하라. 한국에서는 모든 자원이 교회로 휩쓸려 들어간다. 그런데, 교회는 그 자원을 목회 논리 혹은 교회 성장 용도로만 사용하기 십상이다. 그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기구들이 필요하다. 복음주의 운동의 대의와 필요에만 충실하면 되는 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전 시대의 인프라들이 퇴색하지 않고 그런 역할을 하도록 견인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조직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다. 과감한 시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야 한다.

 

넷째, 시대정신을 붙잡으라. 복음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완성된 것도 아니고, 18세기 대부흥운동에서 정점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20세기 후반의 복음주의 르네상스가 우리가 그려볼 미래의 전부도 아니다. 한국 복음주의는 우리 시대의 핵심적 과제를 과감히 부여잡고, 이를 신앙적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혼신의 시도 속에서 제 길을 찾을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에 헌신하는 것이 우리 시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싸움이 된다는 확신이 선다면, 복음주의의 클라이맥스는 다시 오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이 탐구를 수행하는 복음주의를 일컬어 형성 중인 복음주의(evangelicalism in the making)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신학적, 학술적, 실천적 자원을 투입해서 답을 찾아가는 노력이 우리 시대를 위한 복음주의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1] 성경에서 복음(good news)이란 표현이 사용되는 구절들(1:15, 2:10-11, 4:18-19, 10:15, etc.)이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다스림를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자가 헌신할 복음은 소위 개인전도를 넘어선 범주이다.

[2] 미국 복음주의에 대한 표준적 이해에는 마크 놀(Mark Noll),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 등의 책을 권할 만하다. 영국의 경우는 데이빗 베빙턴(David Bebbington), 존 스토트(John Stott)와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의 저서들을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상황을 중심으로 복음주의를 정의하려는 가장 최근의 논쟁을 적나라하게 보려면 Kevin T. Bauder, R. Albert Mohler Jr., John G. Stackhouse Jr., Roger E. Olson 4명이 공저한 Four Views on the Spectrum of Evangelicalism (Zondervan, 2011)를 참고하라.

[3] 국제적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로잔운동을 꼽을 수 있을 텐데,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로잔III의 논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좌장으로 작업한 선언문 Cape Town Commitment 에 잘 드러나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논의 외에도 생태, 환경, 여성, 인권 등 전 분야에 걸친 윤리적 의제를 복음주의자들의 헌신을 요청하는 주제로 담고 있다.

[4] 한국 복음주의를 다루는 연간기획을 2012년 한해 동안 진행하고 있는 <복음과상황>의 지상논쟁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도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종교학 분야에서 한국 복음주의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들이 국내외에서 나오고 있어서 조만간 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단행본 수준의 논의는 많지 않은데,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 2009) 80년대 이후 복음주의를 비판적이지만 풍성하게 다루고 있는 학술저작으로 첫 손에 꼽을 만하다.

[5]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운동이 한국 개신교의 형성에 끼친 역사적 궤적을 방대한 사료와 비판적 평가를 곁들여 가장 잘 드러낸 작업은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일 것이다.

[6] 80년대에 CCC의 정동채플이 주일 예배를 드린 것이 대표적으로 지역교회의 반감을 일으킨 경우였다. CCC는 대외적으로 멤버들의 지역교회 참석을 권장하고, 정동 채플의 예배를 단체의 모임으로 인식하도록 수위를 낮추었다. 당시 네비게이토선교회의 경우도 회관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비판을 받자, 영락교회 등에서 단체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회관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UBF 90년대까지도 지역교회와의 보편적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7]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UBF의 사례를 소설로 쓴 조성기 <야훼의 밤> 연작일 것이다. UBF의 초창기 리더십 문제는 이후 ESF로 분열을 겪게 하였고, 2000년대 초반 CMI로 분열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8] The Spectrum of Evangelicalism, 121.

[9] 영국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평가하는 측면에서 존 스토트와 마찬가지로 성공회 내 복음주의 전통에 있는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 1980년대 이후를 복음주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반면, 로이드 존스의 전기를 썼던 이안 머레이(Ian Murray)교리적 희석과 분열이 심화되었다고 보는 입장 차이를 보인다.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가 보수화 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스탠리 그렌츠 같은 이를 복음주의 좌파(Evangelical Left)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는 우려를 표하는 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그 상대편에는 밀라드 에릭슨, 알버트 몰러, D.A. 카슨, R.C. 스프로울 등이 포함된다.

[10] 가나안 성도란 용어는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을 지칭하는 농담처럼 사용되던 것인데, 1회 교회 2.0 컨퍼런스에서 이것이 지시하는 현상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음을 발제한 바 있다.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66

[11] 양희송 포스트-2007 시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복음과상황> (2008.8). 내용은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14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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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2011.06.13 14:41

김동호 (높은뜻교회연합 목사) : 잘 사는 것 VS 잘 살게 하는 것

 

잘 사는 것이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잘 사는 것 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사는 것보다 남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를 알게 된다면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높은뜻교회연합 김동호 목사

 

유인경(경향신문 선임기자) : 태도의 힘

 

반백년 넘는 삶, 26년간의 기자생활을 통해 알게 된 진실은 ‘태도’가 그 사람의 인생과 평판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태도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소통과 공감의 시대에 인정받는 태도를 가진 이들의 공통점을 소개합니다.

 

경향신문 유인경 선임기자

 

하승창(더체인지 대표) :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생각의 플랫폼

 

변화를 위한 우리의 생각이 세상을 바꿉니다. 변화를 위한 해법은 우리 곁에 이미 있습니다. 어떻게 연결하고 협력을 이끌어내어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요?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공동체의 비전과 전망을 함께 만들어 가는 열린 플랫폼을 꿈꿉니다.

 

하승창 더 체인지 대표

 

김명준 (다큐 '우리학교' 감독, 몽당연필 집행위원장) : 우리는 왜 조선학교를 지원해야 하는가?

 

조선학교는 단순히 북쪽, 조총련만의 학교가 아닙니다. 남쪽인 고향인 재일동포들의 자녀와 후손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바로 조선학교이기도 합니다. 일본 대지진 후, 센다이 지역의 조선학교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제 지난 65년 동안의 무관심은 던져버리고, 우리가 이들을 도와야 할 때입니다.

 

김명준 감독

 

조영헌(홍익대학교 교수) : 가족신문의 조용한 혁명

 

28년 전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가족신문을 만들어왔습니다. 어느새 역사학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학회 논문 발표보다 가족신문 발행날짜를 목숨처럼 지키고 살고 있습니다. 가족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 그 조용하고 거대한 삶의 에너지를 소개합니다.

 

조영헌 홍익대학교 교수

 

임영신(공정여행전문가) : 공정여행, 희망을 여행하라

 

여행자가 아니라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바로 공정여행의 시작입니다. 여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삶의 그늘과 고난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어김없이 발견되는 희망. 바로 그 희망을 위해 여행하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가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erasmus
광고2011.06.01 09:20

손봉호(고신대학교 석좌교수) : 한국교회를 살리는 세 가지 가치

 

한국 기독교가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는 평가도 듣고 있다. 이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답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아프게 느끼지 않고 있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이야기 하고 싶다.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맹명관(마케팅 스페셜리스트) : 결핍이 에너지다!

 

세계 1위의 기업들은 ‘결핍’, 즉 없음에 주목한다. 비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거나 보이지 않아도 미래시장을 주도할 가치를 찾는 일, 그것을 선점하는 기업은 어김없이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마련이다.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때로는 우리 삶의 결핍이 삶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맹명관 마케팅 스페셜리스트, 포스코전략대 주임교수

 

유광수(연세 대학교 교수, 소설가) : 고전이 주는 찬란한 유산

 

빤한 주제, 평범한 소재와 인물...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 속에 가끔씩 강렬한 인상과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있다. 이들 이야기 속에는 ‘고전’에서 가져온 원천 소재가 숨겨져 빛을 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핵심을 잘 이해하여 오늘 날 되살려낼 수만 있다면 참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이 될것이다.

 

유광수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소설가

 

송인혁('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저자, TEDxSeoul 오거나이저) : 창의력은 ‘우리 사이’에서 나온다!

 

창의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아이디어와 열정은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창의성은 어느 개인의 능력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정, 아이디어, 사랑.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사이에 있다. 사이를 발견하고 사이의 가치를 이끌어낼때 우리는 진정한 창의가 이끌어내는 기적을 만날 수 있다.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저자', TEDxSeoul 오거나이저

 

박용준(인문학잡지 인디고 편집장) : 희망의 진원지를 찾아서

 

인문학은 인간학이다. 사이-존재로서의 인간(人+間)은 세계와의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변화를 모색할 것인가.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 인문학의 가치란 바로 이 희망을 정의롭게 구현하는데 있다.

 

박용준 인문학잡지 인디고 편집장

 

이호선(한국노인상담센터장) : 부모가 알아야할 더 중요한 것들

 

자녀교육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부모교육이다. 자녀에게 바른 교육을 하기를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알아야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양육은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파트너십이라는 것을 부모는 알아야 한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erasmus
광고2011.05.16 17:32

CBS-청어람아카데미 공동기획으로 준비된 한국형 TED 강연회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그 첫 장을 엽니다.


곽동수
(한국사이버대 겸임교수) : 스마트 시대, 진짜 스마트하게 사는 법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까지! 스마트 세상이라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고, 배워서 활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 당신을 위해 ‘스마트한 생활’의 가이드를 알려드립니다.

 

나는 : 강의하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잘하는 곽동숩니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컴퓨터, 디지털 선생으로 알려진,
낼 모레쉰인 젊은이입니다.

 

이범(서울특별시 교육청 정책보좌관) : 아이를 미래형 인재로 키워라

 

모방을 통한 성장의 시대가 저물고, 기업이 ‘창의성’을 요구한다. 지식의 소유 여부보다 지식을 활용하는 역량이 중요하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아이를 미래형 인재로 키우는 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 학원가 최고의 스타강사에서, 공교육계 정책담당자로 변신하다

 

제윤경(가계재무전문가, 사회적기업 에듀머니 대표) : 이념적 소비! 내 지갑을 지키는 지혜

 

각종 저가 상품을 통해 소비자를 현혹하는 대형마트, 이들의 저가 마케팅에 숨겨진 음모를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은 행복한 소비자가 됩니다.

 

나는 : 적게 소유하며 품위있게 살며, 적게 소비함으로 우아하게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김남훈(격투기해설가, 청춘매뉴얼제작소 저자) : 청년들이여, 스펙에 하이킥을 날려라!

 

온갖 스펙 쌓기와 취업 경쟁 속에서 쓰러지고 좌절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고하는 프로레슬러의 외침! 열정의 하이킥을 날려라! 

 

나는 :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악당 프로레슬러이자 입으로 몸으로 그리고 머리와 가슴으로. 전신전령으로 싸우는 육체파 지식 노동자

 

홍순관(가수) :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어른 때문에 아이가, 학교 때문에 학생이, 정부 때문에 백성이, 강대국가 때문에 약소국가가 제 숨을 쉬지 못한다면, 평화는 없습니다. 내가 나처럼 숨쉴 수 있을 때 진짜 평화가 옵니다.

 

나는 : 영혼과 마음과 신앙을 담아 노래하는 가수,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지닌 우리시대의 예언자

 

선대인(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 이제는 세금혁명이다!

 

한국 사회경제의 당면한 문제와 다가오는 충격에 대응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은 나라 살림살이의 틀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세금혁명입니다. 

 

나는 :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맞서 삶을 헌신했던 저자이자 연구자로 기억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상 여섯 분입니다. 강의제목과 순서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5월 20일 금요일 목동 KT체임버홀!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참가신청(무료) 클릭! ->http://bluezine.tistory.com/393

 

공동기획 : CBS, 청어람 아카데미

제작 : CBS

Posted by erasmus
광고2011.04.18 18:18


이미 시작하긴 했지만,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올려 둡니다.

제1강(3/28) "태초부터 감추인 비밀: 르네 지라르" (정일권 박사)
제2강(04/04) "진화하는 기독교의 십자가의 의미: 과정신학" (김희헌 박사/ 기사연 연구실장)
제3강(04/11) "예수의 정치, 십자가의 정치: 존 하워드 요더" (김기현 목사/ 로고스서원)
제4강(04/18)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톰 라이트" (권연경 교수/숭실대)
제5강(04/25) "영광의 신학 대 십자가의 신학: 루터" (김주한 교수/한신대)
제6강(05/02) "십자가- 빛과 소리, 글과 말: 윤동주" (김응교 교수/숙명여대)

장소: 명동 청어람 
문의: 전화 02-319-5600
수강신청: 청어람아카데미 http://bluezine.tistory.com/340 

Posted by erasmus
(2) 복음주의2010.11.26 17:02



교회2.0 컨퍼런스 : 가나안 성도 (양희송 /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지난 2010년 11월 22일(월)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린 "교회 2.0"에서 발표한 프리젠테이션 자료입니다.


'가나안 성도' 관련 참고할 논의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좌담 "가나안 성도여, 헤쳐모이자?" 복음과상황 (233호, 2010.03)

2. 정재영 "가나안 성도, 그들은 누구인가?" 바른교회아카데미 2010년 연구 프로젝트 논문

2010project_Canaan1.pdf

 3. 조성돈 "가나안 성도로 나타난 한국교회의 종교성과 나아갈 방향" 바른교회아카데미 2010년 연구 프로젝트 논문 

2010project_Canaan2.pdf









Posted by erasmus
(2) 복음주의2010.09.30 21:21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현실과 과제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 yangheesong@hotmail.com

 

마크 놀이 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IVP)이 새롭게 출판되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미국에서 1994년에 출간했고, 한국에서는 이듬해 번역 출간했던 책이다. 미국 복음주의가 어쩌면 가장 좋았던 시절에 복음주의권의 일급학자에게서 터져 나온 고발이자 경고였던 셈인데, 오늘 우리 상황에 울림이 크다. 결국 우리의 관심은 오늘 한국 복음주의 지성에는 어떤 스캔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고, 이에 대한 우리 나름의 분석과 진단이 제출되어야 한다.

 

한국 복음주의 전반의 지성적 현실을 여기서 꼼꼼히 평가할 형편은 아니다. 몇 가지 주요한 고민의 윤곽을 내어 놓고자 한다.

 

 

1) 복음주의권에 ‘대중 지성’이 있는가?

 

복음주의 신앙인 대중이 접하고 향유하는 문화 풍토는 어떤 지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 영역은 합리성을 결여한 주장을 스스로 걸러내는 자정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권위나 대세에 그대로 순응하는 경향이 주도적인가? 호흡이 턱턱 막히는 목회자들의 발언이 예사롭게 개신교 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종종 암담하다. 저런 이야기를 멀쩡히 들어주는 대중들이 있으니 그런 언동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강남의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의 교회에서 상상 불가능한 몰지각한 언동이 발생하는 것은 그 집단의 지적 파탄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성은 ‘정보를 많이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지성이라면 인터넷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 지성은 ‘얻은 정보를 평가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으로 확장되어야 마땅하며, 그런 면에서 지성의 미덕은 실천을 가능케 하는 용기에 있다고 본다. 오늘 한국 개신교에는 올바른 지식도 없고, 그 지식을 실천할 용기는 더더욱 없는 것 같다. 결국 대중지성은 빈약의 수준이 아니라, 파탄 난 상태처럼 보인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일차적으로 집단은 그 집단의 지도자 수준을 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 개신교의 대중 지성 몰락은 사실상 지도자들(대체로 목회자들)의 지성 몰락과 뗄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만다.

 

대중이 지식의 생산이나 유통의 적극적 주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많다. 그러나, 그 말이 대중은 무지하거나 무능하다는 말과 같을 수는 없다. 한국 근대화 초기에 개신교인들은 가장 잘 교육받고, 합리적이고, 민주적 덕성을 일찍 흡수한 이들에 속했다. 지금 만약 개신교인들이 지적으로 편협하고, 정치적으로 퇴행적이고, 경제적으로 이기적이고,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면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걸어온 과정이 어떠했기에 대체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치열하게 되물어 보아야 할 일이다. 결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도 괜찮은 일은 아닌 것이다. 복음주의 대중이 지적 담론을 접하고, 소통할 수 있는 구조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 예배에서의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의 구조가 그간 어떻게 변해왔는가도 연구 대상이다. 대외적으로는 출판이나 언론 분야에서 이런 역할을 감당해 왔는데, 지금 이 영역들은 대중을 계몽하는 위치인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처지인가? 조직이나 구조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은 완전히 역전된 경우가 많다. 한국 복음주의에 대중적 지성을 고양할 전략은 대체 어떤 것이 가동되고 있는가?

 

 

2) 복음주의권에 ‘전문 지성’이 있는가?

 

‘전문 지성’이란 일단 직업군이나 내용면에 있어서 매우 지식 집약적이고, 사회적으로 상층부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이들을 칭하는 것으로 해 보자. 그런 이들이라면, 교회 나가는 이들 중에 쌔고 쌨다. 지금 대통령 이하 국정 전반의 책임 있는 위치에 개신교인들이 차고도 넘친다. 대학교수들의 개신교 비율도 아마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서울 강남의 개신교인 비율은 전국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고급한 고소득 직업군으로 가면 개신교 비율이 훨씬 올라갈 가능성이 많다. 복음주의권에 지식인이나 전문가 집단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과연 현재 해당 분야에서 등장 가능한 기독 지성의 최고치를 대표하거나, 양성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모임들은 단지 직업군으로 묶은 것이거나, 교제권이나 동호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일쑤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해당 영역 종사자에 대한 목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이상을 잘 보지 못했다. 결국 신우회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나가기 어렵다. 대표적인 경우가 복음주의 학생 선교단체들이 ‘기독학사 운동’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다. 뚜렷이 등장하는 두 가지 필요, 즉 해당 분야 전문성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와 해당 분야 종사자들을 위한 목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사이를 방황하다가 대부분 살아남는 경우는 후자이다. 이유는 전자를 감당할 안팎의 전문 역량이 집결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고, 동시에 외적으로는 그 역할을 수행할 목회자 그룹의 진입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기 때문이다. 직장 신우회나 기독실업인회, 기독교수 모임, 기독출판인 모임, 기독연예인 모임 등에서는 사실상 유사 목회 구조가 가동되고 있다. 특수 목회로 여겨 지역교회 목회를 대신해서 이런 분야로 진출하는 간사나 목회자의 수도 늘고 있다. 그것 자체를 나쁘게 볼 일은 아니나, 그 결과로 어디에나 목회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곳에서 해당 분야에 대한 연구, 토론, 대화를 할 여지는 의외로 적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 치명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안으로는 목회 구조, 밖으로는 이해 집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이런 기독 모임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아마도 기독 법조인, 기독 의료인, 기독 교사 등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구조적인 노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 외에는 두드러진 예외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 복음주의권의 노력과 시도들

 

복음주의 지성과 관련한 움직임들은 여러 층위에서 발생한다. 주변에서 파악되는 것들만 거칠게라도 정리해 보았다.

 

1) 학술 단체와 학술 모임

그 동안 복음주의권의 대표적 학술 운동 단체로 여겨졌던 기독교학문연구소(기학연, 1984)와 (사)기독학술교육동역회(1984)가 지난 2009년 말에 조직을 통합하여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학연이 발행해 온 학술지 <신앙과 학문>이 2009년 말 학술진흥재단 등재지가 되었다. 이로써 이 단체는 학자들의 논문을 받기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학술적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다른 그룹들에 비해 매우 전향적 상황이긴 하지만, 이런 조건이 과연 기독교 사회 전반의 지적 주도권을 형성하는 데에 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학술계의 내부 정치로 정체되고 말 것인지는 냉정한 평가와 주목을 요한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은 예전 분당중앙교회 인재양성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외 유학 생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여, 영문 신학학술지를 발간하는 등 매우 고급스런 신학 연구 및 학술 작업을 수행했다. 현재는 한국 기독교 초기 인물들의 전기 및 원전의 영역 간행 사업을 수년 째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신학 분야에서 전세계에서 공부하는 소장 연구자들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한 편이고, 크고 작은 교회들의 과감한 재정 지원을 이끌어 내는 등 활동력도 좋아 보인다. 다만, 현재는 네트워크 유지와 출판 프로젝트에 역량이 전적으로 투입되다 보니 그 외의 활동 폭은 제한적이다.

 

정식적인 학술 단체로 꼽히기엔 아직 성급할지 모르나, 연구를 본업으로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인 이들의 모임이 등장하고 있다. ‘인문학과 성서를 사랑하는 모임’(인성모)은 주로 대학 강사나 소장 교수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으로, 아직은 매월 정례 모임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어 활동력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례 모임 때 회원들의 논문 발표나 연구 동향 등의 리포트 시간을 갖는 등 인문학 공부를 매개로 하고 있는 현역 학자들의 모임이란 점에서 발전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연구집단 카이로스(CAIROS)’는 석사 재학에서 박사 수료 정도의 과정에 있는 연구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밀도 있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재야의 학술 단체 역할을 했던 ‘수유+너머’의 연구원 출신들이 함께 참여하는 덕분에 공부의 지향점이나 모임의 운영 방식에 있어서 유사점이 엿보인다. 주중에 회원들 및 외부 참가자들이 함께 다양한 세미나를 열고, 연구공간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는 스태프가 있다는 점 등이 특기할 만하다. 대체로 진보적 학풍을 갖고 있으나, 복음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서 복음주의권의 학술적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모임은 서울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크고 작게 있다. 대표적으로 부산의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한국기독학생회(IVF)의 연구소 중 하나인데, ‘일상생활’이란 화두를 놓고 신학적 연구와 강연, 스터디 모임, 계간 학술지 발간 등으로 내실 있게 운영하고 있다. 아마 지역별로 특화된 그룹들이 꽤 있을 텐데, 차후로 지역 간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2)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

신학교나 기독교 대학의 현실은 한마디로 외화내빈이다. 주요 신학교 대부분은 이런 저런 학내 분쟁에 휘말려 교단 정치에 자의반 타의반 희생되고 있고, 교단 신학의 울타리 내에서 안전한 게임만을 반복하고 있다. 사회적 공론의 장에는 출전시킬 선수가 없다. 신학자들이 교회의 지성 역할을 해야 할 존재들이라 볼 때, 이는 곧 신학자들이 내부 정치에 묶여 대사회적 공적신학자(public theologian)의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포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뜨거운 현안에 대해 어느 교단 신학교 교수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학자적 소신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뜨거운 목소리를 내는 역할은 다 목회자들에게 돌아가 있다. 보수든 진보든 이 현실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신학자들이 다 자기 교단 목회 후보생 트레이너를 자임하고 있는 한 한국 교회의 지성은 신학자들의 무책임한 역할 포기로 인해 갈수록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신학자들은 목회의 기술이 아니라,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독교 대학의 현실도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의 교육 정책 흐름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편승하느냐가 대학 존립의 주요 과제가 되어 버린 한국의 대학 교육 현실이, 기독교 대학이라고 다르지 않다. 제1세대 미션스쿨인 연세대, 이화여대 정도를 제외한 후발 기독교 대학들은 연구 중심보다는 교육 중심으로 방향을 잡는 경향이 뚜렷한데, 이는 통속적으로 “미션스쿨들의 기독교적 건학 이념이 퇴색했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뚜렷한 기독교적 교육을 수행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교수 임용 정책, 학사 과정 운용, 학생 활동, 학생 모집, 학내 종교 활동 등의 제반 영역에서 대학이나 교수의 연구 업적이나 지성적 탁월성보다, 경건 교육이나 신앙적 동질성 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식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로 인한 부작용이 적지 않고, 기독교 대학마저도 지성적 책무를 제대로 정의하지도 못하고, 수행하지도 못하는 아이러니에 처하게 되었다.

 

올봄에 출범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현직 신학교 교수들이 파트타임으로 참여하면서 시작한 실험적 교육 프로그램인데, 교단 신학 울타리로부터는 좀 자유롭되, 신학적으로는 균형감과 탄탄한 내용을 평신도 그룹에게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이 모임의 출범으로 평신도의 신학 교육 수요가 적지 않다는 점은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인데, 가르치는 교수들의 헌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조만간 해결되어야 할 관건이다. 그리고, 대안적 신학교까지는 이들이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학 분야 이외의 영역에서 터져 나오는 필요에 대해서는 대책이 요원하다. 기독교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대한 구상을 갖고 있는 듯한 그룹이 여기저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복음주의 운동의 장기 전략 차원에서 논의가 절실하다. 느헤미야는 이 논의의 마침표가 아니라, 시작점으로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3) 아카데미들

현재 활동 중인 아카데미 중 손에 꼽을 만한 곳으로 기독청년아카데미, 현대기독교아카데미, 청어람아카데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카이로스 정도가 꾸준히 세미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범주에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 운동은 이렇듯 대중을 위한 교양 강좌를 주로 하는 곳에서 대학원생 정도의 수준에 맞추어 학술적 세미나를 운영하는 곳으로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다들 재정이나 인력 운영이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복음주의 운동이 당면한 학습의 욕구와 자기 성찰의 욕구가 목에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기존의 교회나 단체에서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한다.

 

기독청년아카데미(2004)는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위치한 공동체교회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주로 성경 강해, 교회사, 세계관 등 오랫동안 운영해 온 기본 프로그램을 학기마다 반복적으로 운영하고 있고, 때마다 기행을 가기도 한다. 매우 대중적이고, 참가자들의 상호소통이 활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주로 자체 강사진에 핵심 역량을 의존하고 있어서, 배후의 공동체가 건재한 이상 운영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강좌의 내용을 새롭게 개발하거나 현안과 흐름에 따른 순발력 있는 기획을 만들어 내거나, 전문적 역량의 동원이 필요한 경우 등에 풀어야 할 과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기독교아카데미(2004)는 주로 신학적 주제를 다루는 학술적 강연이나 세미나를 개최한다. 해외 유학을 마치고 들어온 신진 혹은 중견 학자들을 꽤 폭넓게 강의자로 초청하고 있다. 신학이나 기독교 철학 등의 전공자들에게서 흥미로운 기획들이 자주 선보인다. 운영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인 것으로 보인다. 지속 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인데, 여기에는 재정이나 인력의 문제도 있고, 참여 대중을 어떻게 넓혀갈 것인가 등이 포함될 텐데, 다루는 주제들에 대한 강사의 비교 우위나 기획의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어람아카데미(2005)는 기독교 아카데미이면서도 신학 중심의 프로그램을 탈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 인문학을 지향하는 대중 강좌를 전면에 포진시키고 있고, 문화예술 강좌들이 매 학기 고정으로 제공된다는 점, 정치사회적 현안 이슈들을 그때 그때 신속하게 기획에 반영해서 대응한다는 점 등을 특색으로 꼽을 만하다. 일반 언론에도 노출빈도가 높은 편이고, 강좌 외에 복음주의 운동의 다양한 논의나 젊은 세대들의 움직임에 직간접적으로 허브 역할을 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잘 발전되면 지식의 생산, 유통, 수용 과정 전체에 영향력을 갖는 매우 강력한 아카데미 운동이 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구상을 감당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인프라를 창출하는 것이 제일의 과제다. 올해 초 높은뜻숭의교회에서 분립한 이래 안팎의 구조들이 잘 정비되면 활동 영역이 대폭 확장될 것으로 기대한다.

 

 

4) 학술적 행사와 수련회 운동

상시 조직은 아니지만, 매년 정해진 시기에 열리는 학술 행사들이 있다. 연초마다 열리는 대학 및 대학원생 수련회 아볼로 포럼(IVF 복음주의연구소)이 올해 3회가 되었고, 매년 8월에 열려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기독소장연구자 컨퍼런스’(청어람아카데미, 한동대 학문과신앙 연구소, IVF 복음주의 연구소 공동 주최) 역시 올해 3회가 되었다. 이런 장이 기독교 신앙과 제반 학문 분야에 대한 강의나 토론, 혹은 석박사급 이상의 논문이 발표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각 직능별 단체들도 이제 대학/대학원생 논문 발표의 자리를 점점 더 만들어 가는 것은 긍정적인 흐름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학술적으로 엄정하고, 학문적으로 이종교배가 가능한 장을 만들지 않으면 역시 우리끼리의 잔치로 그칠 수가 있다.

 

올해 5월에 만들어진 명동의 ‘연구공간 공명’(청어람아카데미, 인성모, 카이로스 공동 출자)은 개관 기념으로 ‘지식수련회’라는 것을 일주일간 진행했다. 오후에는 인문, 철학, 정치, 신학 등 분야별 세미나, 저녁에는 초청 강사들의 인문학 강연으로 진행된 독특한 수련회였는데,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 최창모 교수(건국대 문과대), 김오성(KSCF 총무)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강사들의 인문학 강의가 상당한 토론거리를 남겨 주었다. 전문영역별 기독교 단체들은 매년 혹은 격년으로 수련회를 연다. 비교적 내용과 틀을 잘 갖추어 진행하고 있는 곳으로는 기독법률가회(CLF) 수련회, 기독 교사들이 모이는 기독교사대회, 기독경영연구원 캠프, 기독의료인모임(CMF) 수련회 등이 있다. 이들은 전문분야의 대학생 및 해당 직종 종사자들의 직업윤리와 세계관 등에 대한 강좌를 제공하고 있다.

 

 

전망과 대안

쭉 나열해 놓고 보면, 상황이 나쁘지 않은 듯싶다. 앞서 복음주의 대중 지성과 전문 지성의 존재감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법하다. 흐름이나 추세는 나쁘지 않다. 어떤 그룹은 내리막길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조금씩 솟아오르는 조짐이 보인다. 전체적인 판세나 흐름에 대한 어떤 본능적인 감각은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낙관하기 힘들다.

 

결국 방향과 내용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을 누가 수행하느냐의 문제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은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쪽이 문제 해결에 기여하기보다는 문제 생산에 기여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즉, 인적·물적 자산이 현재 유력한 집단에 투자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원은 내리막길의 기울기를 조금 늦춰 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의 현실은 기독교 지성 운동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 체제를 유지하느라 우리는 너무 많은 비용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몰락을 막지는 못한다. 지금 우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평가하고, 미래의 대안을 만드는 쪽으로 모든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반면, 대안을 모색하는 그룹은 아직 충분한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건이 힘든 것은 인정하지만, 고군분투하는 것이 곧 진정성의 징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진정성만 있으면 충분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을 ‘잘’ 해야 한다. 인적 네트워크를 촘촘히 만들고,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는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는 넓고 읽을 책은 많다. 요즘 우리는 너무 안 읽는다. 필요한 재정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세대교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지만, 두고 볼 일이다. 돈주머니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으면 아마도 세대교체는 허울뿐일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스스로 수평적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실험이 필요하다.

 

특히 대중과의 소통 채널을 확보한다는 면에서 출판 영역과 매체가 중요하다. 기독교 출판은 현재 저자의 완성된 원고를 출판하거나 해외 저자의 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것 이상은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유행이나 주제에 맞추어 기획 출판을 하는 수준에는 현격히 못 미친다. 이런 상황이니 기독교 출판계가 의제를 형성할 내공이 없다. 베스트셀러는 소비적 측면의 현상일뿐 지성적 의제를 던지는 것은 되지 못한다. 일반 출판사들이 기독교 출판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기독교 출판계에는 위협이 될지 모르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돌파구로 반길 일이 될 수도 있다.

 

매체의 역량도 강화되어야 한다. 기독교 잡지, 온라인 매체 등이 다들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 전반적인 매체 환경이 악화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자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읽을 매체가 없다. 매체는 좀더 다변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좀더 독자의 세분화된 감수성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변신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쯤에서 최근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열풍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매체 환경의 대격변이 바로 곁에서 벌어지는 셈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전용할 수 있는 그룹이 등장한다면 그러한 격변에 주도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테크놀로지 자체가 우리의 매체 환경의 구원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전혀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이 모든 노력은 기독교 신앙과 별개로 ‘지성’을 높임으로써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 그 자체를 새롭게 조망하고, 해명해 내야 한다. 대놓고 반지성과 몰지성을 주장하는 몰상식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서 종종 기독교 신앙에 응당 동반될 것이라 여겼던 교양과 상식이 깡그리 증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적지 않다. 우리의 신앙 자체가 지성적 요소에 적절한 자리매김과 위상 부여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복음주의 신앙의 형성 전통에 깊이 내재한 즉각주의(immediatism) 탓이 크다.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반응하기를 요구받는 개인 전도나 전도 설교, 부흥회의 분위기를 연상하면 빠르다. 따져 보고, 돌아보고, 살펴보고의 여지는 없다. 거의 직관적으로, 종종 정서적 고양 상태에서 단번에 결단에 이르러야 ‘옳은’ 것이다. ‘자발성’보다는 ‘사로잡힘’이나 ‘불가항력’의 경험이 신앙에서는 더 선호된다. 이것은 곧 ‘순수함’의 고양으로 이르고, 순수함은 곧 ‘단순함’을 의미한다. 이때 단순함은 인격적 단순함이 아니라, 종종 지적 단순함 정도로 환원된다. 복잡한 사안을 파악하지 못하는 단견은 이런 과정을 거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상찬할 어떤 자질이 되고 만다. 기독교 지성을 이야기하다보면 결국 우리를 구성해 온 신앙의 어떠함을 분석 대상으로 삼게 된다. 우리 자신을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문제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먼저 갖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아마도, 그런 면에서 처절한 회개, 즉 자신을 돌아봄에서 출발해야 마땅할 것이다.

 

 

 

 

 

양희송 님은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로 창의적 담론운동을 이끌고 있다. <복음과상황> 편집장을 역임했고 싸이월드에 ‘복음주의 클럽’(http://evangelical.cyworld.com)을 개설하여 복음주의 관련 연구와 저술, 대중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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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10.02.23 11:47


주일 오후 영풍문고 갔다가 산 책들이다. 한 10만원어치 된다.

윤치호가 평생썼다는 일기를 통해 그가 왜 일본에 '협력'했나를 짚어보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교수의 책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이다. 알려져있듯 박교수는 뉴라이트운동에 꽤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윤치호의 친일행위에 설득력 있는 해명이 될런지 함 보도록한다.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통해 알게된 홀로코스트 생존자 장 아메리의 책 <자유죽음>이 신간코너에 있길래 샀다. 자살을 '자유죽음(Freitod)'이라 표방하고 자유죽음의 현상학을 시도하는 책이다. 결국 삶을 얘기하려면 죽음을 들여다보는 수밖엔 없다.

정치인 책들이 많은걸 보니 선거가 다가오는구나 싶다. 책 만듦새가 괜찮아보여서 두권 샀다. 노회찬의 <진보의 재탄생>과 원희룡의 <국회의원 블로거 원희룡의 블질>. 노회찬 것은 주요 논객들과 연속대담한 것을 묶어놓아 재미도 있고 무게감도 있어 보인다. 원희룡 책은 두권이었는데 하나는 좀 전형적이라 놔두고 블로거들과 함께 엮은 것으로 샀다. 꽤 트렌디한 맛을 잘 살렸고 내용도 진솔한 편이다. 청어람에서 저자초청 특강을 한번 해도 좋겠다 싶다. 

<리영희 프리즘>도 집어들었는데, 이미 평전도 나온 마당에 왠 책인가 싶었는데... 매우 젊은 필자들(한윤형, 김현진)까지 포함하여 기획한 글맛이 사는 책이다. 지하철 타고 집에 들어가면서 넘겨보는데, 재미있다.

아사히신문에서 아마도 기획기사 모음집으로 낸 듯한 <희망사회를 위한 제언>은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쏠쏠히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책 같다. 신문기사라 읽기도 좋고, 내용도 명료하다. 이번 정치아카데미 할 때에는 꼭 필독서로 추천하고프다. 

손철주 기자의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는 꽤 유명한 책인데, 개정판으로 새로 나왔단다. 한번 챙겨두어야 하겠다싶어 구했는데, 도판과 내용이 잘 되어 있어 틈틈이 읽기에 좋아 보인다. 

아직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인데, 일단 자랑질부터 먼저 해본다. 
요즘은 책 안읽어도, 일단 구입만으로도 지성인의 반열에 든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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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rasmus
리뷰2010.01.14 16:00

 강사소개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영국 Trinity College, Bristol에서 신학 BA를, 
London Bible College (LBC) 에서 신학 MA를 마쳤다. 
월간 <복음과 상황>의 편집장 및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2005년부터 
청어람아카데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커리큘럼 소개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

<편력: 내 젊은 날의 마에스트로> <유럽사회 풍속산책>등 지성사를 중심으로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해오고 있는 인제대 명예교수 이광주의 저서『교양의 탄생』. 이 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로부터 20세기의 지식인 참여운동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형성해온 인문정신을 탐구한 유럽 지성사의 완결편이다.

교양은 ‘정신의 육성’을 뜻하고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다. 중세 카톨릭 교권의 체제 속에서 이룩된 카톨링거 르네상스와 12세기 르네상스, 그 토양 위에 세워진 대학이라는 교양 공동체와 같인 정신을 기르는 교양은, 밭을 가는 노동과 함께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양 지향적이다.

교양이란 무엇이며 교양인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 물음은 고도의 기술 산업 정보사회에서 존재의 망각, 인간 상실현상이 날로 격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더욱 절박한 문제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진정 오늘날의 교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하여 유럽에서 형성된 거의 모든 교양을 만나는 기회를 마련한다.


저자 이광주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뒤 지성사를 중심으로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해 폭넓은 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지금은 인제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길아트와 한길사에서 각각 펴낸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과 『동과 서의 차 이야기』『윌리엄 모리스, 세상의 모든 것을 디자인하다』『편력: 내 젊은 날의 마에스트로』『지식인의 권력: 근대 독일 지성사 연구』『유럽사회 풍속산책』『대학사』 등이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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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rasmus
(2) 복음주의2009.10.28 13:37

* 2009.10.27 청어람에서 열린 '가가와 도요히코 사회선교 헌신 100주년 기념 한국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그리스도교 입문>은 현재 번역이 완료되어 올해 내로 출판될 예정이며, 이 서평은 번역본 한글 원고를 읽고 쓴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그리스도교 입문>

 

 

 

1.

나는 이 책을 통해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를 사실상 처음 만났다. 대학시절 한국교회사와 일본교회사에 대해 읽은 약간의 책들이 내가 그의 이름을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고, 아마도 오늘날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읽는 책 가운데에는 더욱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1]

 

그러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약간의 수고만 한다면 그가 일본사회와 일본 기독교 역사에 얼마나 비중이 큰 인물인지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부유한 집안의 아버지가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출생의 내력을 두고 내적으로 깊이 고민하였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15세 때 미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신학을 공부하던 중 고베의 빈민가에 투신하여 폐결핵으로 죽음을 넘나들며 가난한 자들을 헌신적으로 돌아보았던 이야기는 그의 책 <사선을 넘어서> 등에 잘 드러나 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프린스턴에서 신학과 생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서 다시 빈민운동에 관여하면서 그의 활동 영역은 넓어지기 시작한다. 1921년과 22년에는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 것으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고, 농민운동에도 관여하여 일본농민조합의 결성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가 참여한 남성 참정권 운동 역시 1925년에 성취가 되는 성과를 얻었다. 이 무렵 결성한 예수의 친구회(1924)를 통해서 백만인 구령운동을 벌여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이름으로 복음전도와 사회개혁을 접목한 운동이 전쟁 전과 후에 진행된다


한편, 그는 평화주의적 소신에 입각하여 ‘비(非戰)동맹(1928)을 결성하여 군국주의에 저항하였다. 해외로도 널리 다니며 인도의 간디와 네루 등을 만나 기독교 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연대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사죄하는 글을 발표했고, 다시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평생 200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고, 노벨문학상에 두 번(1947, 48), 노벨평화상에 두 번(1954, 55) 후보로 추천되었다.


그의 일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으로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빈민촌에 투신하였던, 죄의식에 몸부림치던, 하나님 외에는 아무런 소망을 두지 않는 구도자의 모습을 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로새겨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근대 일본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평화운동, 사회주의 운동의 전 영역에 그 흔적을 드리운 역동적인 사회운동가적 면모가 있다. 그는 이런 양 측면을 전혀 모순으로 여기지 않고 한 몸에 간직한 채 끝까지 이런 모든 삶과 행동의 근거를 기독교신앙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빛이 바래지 않는 소중한 모범이 된다.

 

 

2.

이 책은 1949년 가가와 도요히코가 61세 때 출판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도운동에 힘을 쓰는 한편 생협운동이나 노동운동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던 무렵에 그가 돌아본 기독교 신앙의 여러 측면을 기술한 매력적인 책이다. 책은 전체 2부 총 30개 장에 걸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가와의 성찰이 잘 담겨있다.

 

책의 전체에 걸쳐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적절히 담아내면서 기독교 신앙을 소개한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종교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 병의 극복, 가난할 때, 죄에서의 해방, 죽음의 극복 등의 장에서는 자신의 출생과 가정에 관련된 내적 고민,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소개받고 가졌던 번민들, 끊임없는 죄의식과의 싸움, 자살 유혹의 극복, 처절한 가난의 경험들, 빈민들과의 삶에서 본 것과 느낀 것, 폐병을 앓으며 들어간 고베 빈민촌에서 기적적으로 병이 회복되었던 간증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의 삶이 드라마틱했던 반면, 간결한 그의 문장은 인상적이다. 이미 61세의 나이에 삶을 되돌아보며 쓴 때문인지 감정적 과장이나 감상적 느낌이 없고, 간결하면서도 속도감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쉬크(chic)한 느낌이다. 지금 보아도 낡은 감이 별로 없다. 오히려 여전히 시대를 앞서가는 감수성이 종종 포착되곤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 장에서는 젖가슴이 있는 하나님이란 절이 있다. 히브리어 하나님 명칭인 엘 샤다이(El Shadai)에 대한 짧은 묵상인데, 오늘날 여성신학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모성성에 대한 빼어난 묵상이 전혀 이질감 없이 잘 드러나 있다.

 

나 같은 고아가 강가에서 자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젖가슴 덕분이다.

기생의 자식으로 태어나, 쓰레기 상자 곁에서 자란 내가,

겨우 혼자 걷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젖가슴 덕분이다.

 

종교와 연애, 종교와 결혼, 종교와 성욕 등의 장은 매우 솔직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이 주제를 다루는 오늘날의 책이 종종 발언의 주체를 빼놓는데 반해 가가와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조언을 명료하게 전하고 있다. 어린이의 종교, 여성의 종교, 농민의 종교, 노동자의 종교 등을 다루는 장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무시되는 존재들 각각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리매김해주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통해 성경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노동하시는 분임을 밝히면서 그가 경험한 미국과 영국의 노동운동가들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는 운동을 하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대목은 비록 그 시대가 사회주의 운동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비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2부는 11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경, 예수의 생애, 예수의 교훈, 사도 바울 등 성서학적 접근에 더해서 종교와 도덕, 종교와 철학, 종교와 과학, 종교와 예술,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 사회운동, 평화와 전쟁 등으로 주요한 삶의 이슈들과 관련 지어 한 장씩 쓰고 있다. 

 

유물론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결정적이며 역사의 운행이 기계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면, 성장도 아무 것도 없으므로 무저항주의의 윤리가 성립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고, 자본가에게는 양심이 없고, 모든 문제가 투쟁과 유혈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길은 회개와 재생이 있는 길이다. 성장력이 있는 정신이 폭발하여 회개하고 재생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야 말로 무저항의 태도를 취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무저항 사랑이라고 한다. 무저항은 비겁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저항의 의미를 잘못 알면, 그것은 악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악에 대한 근본적 부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저항이란 감정적인 손찌검을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 근저에는 하나님과 같은 사랑에 대한 동경이 있다. 사랑과 희생을 두려워하는 자는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과 희생을 싫어하지 않는 자는 무저항주의를 취하게 된다.

 

가가와는 여러 번 그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그의 유물론에는 동의하지 않고, 혁명의 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에도 확연히 입장이 다름을 밝힌다. 그가 그려본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은 이런저런 이데올로기적 구상의 실천에서가 아니라, 성경적 비전의 지평 위에서만 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 위에서 그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교육운동 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3.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일본의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것을 쉽지 않게 만드는 몇 가지 전형적인 장애물이 있다. 첫째는 일본의 제국주의 문제이다. 일본의 기독교 역사에 아무리 위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일지라도 그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 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호감을 갖기는 어렵다. 일본의 많은 기독지식인들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접어들면 결국은 제국주의에 동참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 민족주의에 동원되는 양상이 되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에게서 어떤 신앙적 모범을 찾기는 어렵다.

 

둘째는 전후 두 나라의 기독교 전개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교회성장을 경험했고, 개신교가 인구의 20%에 육박한다. 반면 일본은 여전히 1%도 되지 않는 기독교 인구를 갖고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본의 기독교, 혹은 일본 교회란 배우고 참고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하고 회피해야 할 문제(problem)로 종종 인식된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가 그렇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기독교 신앙 자체가 지식인 위주로 편향되었다든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노선에 영향을 많이 받아 복음의 생명력을 갖지 못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묘사하곤 한다.

 

사실 이런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좀더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는 피선교지에서 제국주의적 선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개신교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회적 신뢰성을 잃고 있다든지, 근본주의적 신앙 색채를 보이고 있다든지 하는 다양한 근거에서 비롯된다. 최근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동아시아의 기독교를 함께 탐구하면서 각각의 차이와 공통점을 거시적으로 조명해보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가가와 도요히코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소개되는 것은 의미가 크다. 아마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정도가 유일하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꽤 널리 수용될 수 있는 존재였다면, 그보다 훨씬 행동 반경과 영향력을 넓게 갖고 있었던 가가와 도요히코를 제대로 만나게 되는 것은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기독교의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전 월간 <복음과상황> 편집장.



[1] 나의 대학시절(1987-90년대 초반) 친구들 간에 읽히던 한국교회사 책들은 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출판부, 1972, 1982, 1993);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2, 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9, 1990, 2009) 외에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1981); 한국기독교회사 특강(1987)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일본교회사 책을 읽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아마도 김교신(金敎臣)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 상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책을 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우찌무라의 책은 전집을 비롯하여 구안록, 회심기 등이 소개되어 있어 국내에 어느 정도의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경우에는 순전히 개인적 관심에서 도히 아키오(土肥昭夫, 서정민 옮김), 일본 기독교의 사론적 이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도히 아키오(土肥昭夫, 김수진 옮김), 일본 기독교사(기독교문사, 1991)를 접했다

Posted by erasmus
(2) 복음주의2009.10.25 18:46

서평을 위해 가가와의 <그리스도교 입문>을 읽고 있는데, 100년전 인물이 요즘 사람보다 더 사고의 폭과 깊이가 넓고 큽니다. 앞으로 그의 책들이 꾸준히 출판될 모양인데, 일본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 정도가 전부였던 상황이 많이 개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사 트윗캠 중계 아카이브(1) http://twitcam.com/4kk9 

행사 트윗캠 중계 아카이브(2) http://twitcam.com/4k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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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rasmus
(1) 기독인문학2009.10.25 16:23

* 일상생활연구소 회보 <Seize Life>(2009. 08 통권 제3호)에 실은 글입니다. '일상생활 신학'을 소개한 폴 스티븐스 교수의 방한 세미나(2009.10.24)에서도 발표되었습니다. 



 

평신도에게 신학을 돌려주라!

신학교 체제의 극복을 위한 하나의 제안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개신교 성직주의(Protestant clericalism?)

오늘날 한국개신교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내부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흥미롭게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개신교성(改新敎性) 그 자체에 대한 위반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중세교회를 향해 항의했던 이들 (the protestant)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천주교보다 더 강하고 무비판적인 성직주의(clericalism) 성향을 종종 드러내곤 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개신교 성직주의는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옹호논리를 만들어낸다. 첫째는 목회자 직분의 전문성이다. 목회자들은 전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경험적, 학문적 훈련을 거쳤기에 목회자의 입장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회의 전문가일수는 있어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만능 전문가최종 심급의 판단자는 될 수 없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심화된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목회자들의 섣부른 입장표명은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의 발현이나 이해당사자의 일방적 강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명백히 목회자의 과잉대표성(over-representation) 문제를 낳게 되는 바,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묵살하는 옳지 못한 행위이다.

 

둘째는 현실적으로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부족(theological illiteracy)을 꼽을 수 있다. 평신도들이 삶과 신앙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건강하지 않은 계급주의를 낳는다. 신학적 소양 부족은 소양을 키움으로써 해소해야 할 문제이지, 이를 당연시함으로써 이원화된 계급구조를 방치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켜놓는 오류를 버젓이 범하는 것이다. 평신도들도 적절한 신학공부를 해야 한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기독교적 공부 (Christian Studies)를 해야 한다. 그 공부의 내용은 전형적 분과 체제로 이루어진 신학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학문 분야를 기독교적 관심 아래 조망하면서 추구하고, 시도해야 할 기독교적 공부하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교 체제의 실패와 대안 아카데미들

문제는 현재 우리의 현실이 이런 방식의 공부하기를 별로 권장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할 신학교(seminary)교단 목회자 양성소로서의 정체성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다. 상당수의 국내 신학교는 교단신학이란 울타리가 금기와 허용의 잣대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는 신학자들의 자기검열로 이어지면서, 신학교가 과감한 지식생산의 근거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지 교단신학의 수호자에 머물게 한다. 신학생들은 그 와중에 목회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기술을 습득하느라 안팎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단 목회자 양성에 전념하느라 신학교 체제는 신학교 바깥, 목회 바깥의 세계에 필요한 신학적 지원에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닌 것이다. 삶의 정황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답하는 신학(theology on demand)는 신학교 상황에서는 우선순위가 한참 뒤쳐진다. 평신도들은 그 한없는 유보에 이제 지치고,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학교 체제가 변화하거나, 새로운 대안적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이 질문은 영원히 유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신학교의 교육과 성도들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균열이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나 허용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근 한국의 지식사회나 출판계에서 형성되는 기독교에 대한 비호감 정서나 집요한 기독교 비판담론 등에 신학교 체제가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제대로 된 대답을 만드는데 실패한다면 다른 곳에서 대안을 구해야 하겠다든지, 직접 대안을 만들겠다는 자구 노력이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청어람 아카데미를 기획 운영하면서 발견한 소망스런 현실은 그래도 아직 한국 기독교 내에 기독 지성인이라 분류할만한 젊은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해묵은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몸짓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는 저변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더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공부하기에 대한 관심은 점점 대중적으로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대학원 이상 재학중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만만치 않고, 이들은 기독교적 공부의 필요는 느끼되, 이를 위해 활용할 어떤 지적 자원도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소위 재야의 지식권력이란 평을 얻고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성공모델은 자주 벤치마킹 되는 대상이다.

 

기독교권을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들로 청어람 아카데미, 기독청년 아카데미, 현대기독교 아카데미 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런 바탕 위에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 여러 갈래로 생기고 있다. 여러 신학교 교수진이 참여하고 있는 바른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회, 주로 기독 대학원생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있는 아볼로 포럼(Apollos Forum), 매년 여름 소장연구자들에게 전공 영역 연구논문의 발표 기회를 마련하고 있는 기독소장연구자 컨퍼런스(청어람아카데미, 한동대 학문과신앙연구소, IVF 복음주의연구소 공동주최), 자생적 연구자 모임을 결성한 집단지성의 실험실 카이로스(CAIROS) 등 상당히 생동감 있는 모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남겨진 질문과 과제

남은 몇 가지 질문은 이것이다. 첫째, 기독교적 공부를 위한 기관(institution)은 가능한가? 이것은 이론적 질문이면서, 실천적 질문이다. 기존의 기독교 대학()의 이론적 토대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런 기관들이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었는지도 평가해보아야 한다. 예전의 미션 스쿨들은 기독교적 공부하기의 독특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있는지 보아야 하겠고, 최근의 기독교 대학들은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적-지성적 성취에 있어 객관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놓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아카데미 운동들은 비제도권교육(non-institutional education)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장점과 더불어 지속성이나 깊이의 문제 등에 구조적 약점이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좀더 과감한 대안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둘째, 새로운 기관(institution)이 필요한가, 새로운 커리큘럼(curriculum)이 필요한가? 교육이 꼭 제도적 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홈스쿨링 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문제를 제도와 기관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커리큘럼을 보급함으로써 풀어가는 경우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과제는 어느 방식으로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 보아야 한다. 이미 국내외로 기독교 교육기관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우세하지만, 지금 논의되는 기독교적 공부하기를 제대로 수행할 제도권의 기반은 매우 취약한 것으로 판단되기에 선도적 기관의 설립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조만간 있게 될 고등 교육기관 간의 통폐합은 사실상 새로운 방향의 교육모델을 누가 세우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 흐름의 형성을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를 마다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셋째, 새로운 운동을 감당할 역량(capability)이 있는가? 기존의 신학교 체제가 감당 못하는 과제를 수행하려면 그에 걸맞는 학자와 운동가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들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 혹은 통섭(conscilience)적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하고, 신앙적 소양뿐 아니라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최근의 여러 아카데미 운동들 속에서 중견 학자들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소장 연구자들이 커올라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꿰어서 보물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자원들을 다시 한국 대학사회의 숨막히는 관료주의와 실적 경쟁으로 내몰고 말 것이다. 국제적 학문의 장에서 좋은 평을 얻는 기독 학자들을 우리는 어느 정도 확보를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학교를 만들 것이 아니라, 신학자의 수가 1/3-1/2를 넘지 않도록 하고, 인문-사회과학, 문화예술, 교육 등의 영역에 연구 능력을 갖춘 좋은 기독교 학자들이 포진된 학교를 대안적 모델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의 마무리

최근 미국여행을 다녀오면서 몇 권의 책을 샀다. 헌책방에서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 <평신도신학(A Theology of the Laity)>(1958)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구입했다. 평신도의 재발견은 종교개혁이래 참으로 오랫동안 유보된 관심사이다. 아니, 그것은 유보라기보다는 억눌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주의의 폐해가 증가하면 할수록 종교개혁의 잊혀진 슬로건 중 하나인 만인제사장(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이론은 집요하고도 강력하게 재등장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사상운동적 기반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추적해본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몇 개의 아카데미를 만나게 된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 경건주의자들의 교육을 담당한 할레대학(Halle University) 등 한 시대를 지탱하고, 다음 시대를 열어젖힌 모든 운동들은 그 자체의 연구와 교육을 위한 기관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바로 그런 기관이다. 현재의 신학교 체제는 점점 더 자생적 지식생산에 실패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있고, 그 추락을 막고자 하는 노력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압도적 필요와 요청에 비해 제도권의 대응은 그야말로 생색내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 그 결과는 한국교회가 점점 더 개신교성 자체를 잃어가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이런 진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용기와 과감한 실천뿐이 아니겠는가?

 

 

 

Posted by erasmus
(1) 기독인문학2009.09.30 17:01


청어람에서 "미완의 기획, 종교개혁: 2009 한국 개신교와 종교개혁 사상"이란 제목으로 강좌를 운영한다.
홍보물에 넣은 기획취지는 아래와 같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의 개혁 만은 아니었다. 정치-종교-일상이 한 덩어리로 묶여있던 서구 중세의 거대한 질서 전체에 발생한 균열이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되면서 발생한 문명사적 전환의 사건이다. 그 격변의 규모와 파급효과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지금까지 지속되는 현실을 만들어 내었다. 2009년 한국상황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이유는 개신교(Protestantism)의 개신교성(protestant)이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거시적-통시적 안목에서 되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강렬하게 대두하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하는 개혁(reformation)이 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를 상상하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필요 최소한을 재확인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1(10/05) "개신교적 의식의 탄생: 카라바조의 경우" | 상근 교수 (연세대 신학과)

2(10/12) "개신교의 등장과 근대정치의 토대" | 이국운 교수 (한동대 법학부)

3 (10/19) "에라스무스, 인문주의의 이상은 가능한가?"| 강영안 교수 (서강대 철학과)

4(10/26) "루터, 투사-신학자-정치가가 필요하다" | 김주한 교수 (한신대 신학과)

5(11/02) "칼빈은 대체 무얼 꿈꾸었을까?" | 박경수 교수 (장신대 신학과)

6(11/09) "미완의 기획 '종교개혁' 2009년 한국 기독교" | 종합토론

 




생각은 그랬다.

요즘 교회들 꼴이 왜 이 모양인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건사고들을 되짚어가다 보니 언젠가 읽었던 '종교개혁' 관련 책의 내용이 기억이 났다. 종교개혁 시기 중세교회의 면면을 묘사한 내용이 어쩜 요즘 한국 개신교가 욕 먹는 내용과 그리도 흡사한가 싶었다. 교회의 치부, 성직자들의 사생아 출산, 부와 명예의 세습, 관행을 정당화 하는데 동원되는 어용신학 등등... 저 정도면 종교개혁이 일어난단 말이지... 싶었다. 생각이 좀더 진전이 된 것은 이국운 교수 탓이다.



'근대국가의 헌법체계는 개신교 종교개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내용을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 월례 세미나에서 발표하던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곳에 참여한 헌재 연구관들이나 학자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상쾌했다. 물론 그 내용은 여러 모양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나도 헌법논의에 문외한이니, 몇년전의 그 발제문을 내 나름대로 알아먹는데 꽤 시간을 소비한 셈이다. 


여하간, 나는 헌법이란 체제의 탄생에 종교개혁자들의 논의가 깊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근대국가의 정교분리 원칙이나, 관용(tolerance)원칙, 양심과 종교의 자유 등등이 사실은 '세속적 원리'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원리' 특별히 '개신교 정신'에 의해서 추동가능하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헌신을 핑계로 정치사회 영역을 함부로 짓밟는 요즘 한국 개신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어쩌면 개신교 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미묘한 결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단지 단순무식하게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식의 정치밖에는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야 이런 '결을 매만지는 정치' 따위는 턱없는 호사취미 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간다. 종교개혁 시대를 뒤져봐야 한다는 것. 거기에 우리가 못 만난 '길'이 있을 것이란 심증이 점점 깊어진다. 캠브리지의 정치학자인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I)>(한길사) 강독세미나를 지난 여름에 하면서 얼핏 보았던 것도 그것이었다. 아쉽게 르네상스 정치사상을 다룬 1권밖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고, 종교개혁시기 정치사상을 다룬 2권은 아마도 수요부족으로 번역이 요원해 보이지만, 그 그림은 가늠이 된다. 


강좌로 묶어볼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청어람 5년 활동의 결과이다.


종교개혁을 단순히 "예수 열심히 믿자"로 읽지 않고,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 격변으로 추적해서 복원해가려면 적어도 각 영역의 전문가를 마음대로 구사(?)하면서 그림을 그릴 상황이 되어야 한다. 청어람아카데미의 그간 강좌를 통해서 만난 김상근 교수(연세대 신학),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 이국운 교수(한동대 법학)는 이런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학자들이고, 문제의식에 바로 접속이 가능한 이들이다. 루터와 칼빈을 발제해주실 김주한 교수(한신대 신학), 박경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은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인연을 맺은 분들인데, 각각 루터와 칼빈 전공이라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번 강사 섭외를 위해 자료 검색을 해보니 딱 적합한 분들이었다. 올해가 칼빈500주년이라 이런저런 학술행사들이 많은 데 박경수 교수는 가장 단골로 불려다니고 있었고, 김주한 교수는 루터를 좀더 폭넓은 배경에서 조명하는 자신의 저술과 여러 번역서를 갖고 있는 분이었다. 덕분에 이번 논의가 신학교와 신학생들에게까지 미쳤으면 좋겠다.  교회개혁을 논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아니, 많다. 



그러나, 이런저런 현장이나 세미나에서 강하게 현실교회를 성토하는 분들의 논지 역시 어느 정도는 어그러진 현실에 대한 반대상(mirror image)에 그칠뿐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들이 솔직히 자주 있다. 역사로부터 제대로 배운다면 교회를 개혁하자는 이런저런 구상들이 이 얕은 언저리를 이토록 오래 맴돌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이번 강좌를 계기로 삼아 한국교회, 개신교에 관한 나의 생각을 좀더 발전시켜 나가보고자 한다. 

게으르지 않게 글을 이어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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