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2012.10.23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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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Seminar



“포스트-2007 시대와 한국 개신교의 미래”


(Post-2007 Era & the Future of Korean Protestantism)




한국 개신교는 숫적으로는 성장 침체를 겪고 있고, 질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거의 얻지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내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합의된 입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 어떤 대안이 필요하며,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도 실종되어 있습니다. 


이 세미나는 개신교의 최근 30년간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시효를 상실하였는지,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될지를 내다보는 논의의 장을 제공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곧 출판될 책의 초고를 바탕으로 저자의 강연과 난상토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Boston
10월 25일(목) 저녁 7:00-9:00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Jenks Library 212호@ Gordon College (3 min from GCTS)

10월 26일(금) 오후 2:00-4:00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B19 & Hartmann Room (B23)


LA
10월 30일(화) 오전 10:00-12:00 Fuller Theological Seminary 
Payton Hall




강연자: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영국 Trinity College, Bristol(신학 BA)와 London School of Theology(신학 MA)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월간 <복음과상황> 편집장 및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한동대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7년간 강의했다.


다양한 기독교 및 일반 매체에 인터뷰 및 기사를 기고하고 있으며, 랍 벨(Rob Bell)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까지, 톰 라이트(N.T. wright)에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en)까지 ‘복음주의’ 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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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독교 문화관2012.09.08 10:44

<기독교 문화관 특강>

 

<그리스도와 문화> 새롭게 읽기

 

기독교 신앙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문화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삶의 질서 전부를 포괄합니다. 그리스도와 문화가 만날 때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과 이를 설명하는 논리들을 공부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8회에 걸쳐 리차드 니버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를 차근차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문화와 관계 맺는 모습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매 회 60분 강의 30분 질의응답 시간을 진행합니다.

 

일시: 201299-1028일 매 주일 10:00-11:30

장소: 톤한인교회(김영봉 목사) 인근 우래옥 2 (8240 Leesburg Pike, Vienna, VA)

문의: http://www.kumcgw.org/

 

 

1(09/09) “대립모델: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2(09/16) “동일모델: 문화와 동일시되는 그리스도

3(09/23) “중재모델(1): 문화 위의 그리스도

4(09/30) “중재모델(2): 문화와 역설관계의 그리스도

5(10/07) “중재모델(3):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6(10/14) “<그리스도와 문화> 재검토

7(10/21) “사례(1) 기독교 평화주의와 시민종교

8(10/28) “사례(2)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강사: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yangheesong@hotmail.com). 월간지 <복음과상황> 편집장을 지냈고, 2004-2010년까지 한동대에서 기독교세계관을 강의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글쓰고 강의하는 일로복음주의운동을 섬기고 있으며, 2011년에는 청어람-CBS TV 공동기획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을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에서 책을 쓰며, 가족과 안식년을 갖고 있다.




참고자료).



 

1. H. Richard Niebuhr (1894-1962)

그의 형 Reinhold Niebuhr(1892-1971)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윤리학자로 활동. 예일대에서 교수생활(1931-62). Hans Frei(1922-1988)와 더불어예일 학파(Yale School)’로 불리는 흐름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 Karl Barth(1886-1968), Ernst Troeltsch(1865-1923)에게 영향을 받았고, 신정통주의(neo-orthodoxy) 혹은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의 입장을 지녔다.


- ‘H. Richard Niebuhr’ @ wikipedia.org

- H R Niebuhr Online Collection @ http://www.centropian.com/religion/academic/theologians/HRNkit/index.html





2.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1951년 출간된 니버의 대표작으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 논의를 집대성하고 있다.

50주년 기념판(2001)에는 니버의 책을 고전(classic)의 반열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의 서문과 발간 후 제기된 주요한 비판에 대한 응답을 담은 니버의 제자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의 서문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니버의 미간행 논문 ‘Types of Christian Ethics’가 추가되었다.

 


3. 영속적 문제(enduring problem)

1)      그리스도 (Christ): 시공간에 제한 받지 않는 기독교의 총화, 혹은 궁극적 근거

2)      문화(Culture): 인간 활동의 총체적 과정과 결과. 인간의 노력이 자연에 가해져서 형성된 것들의 총화.


 

4. ‘그리스도문화가 관계 맺는 5가지 방식

1)      대립: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2)      동일: 문화와 동일시 되는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

3)      중재(1): 문화 위의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4)      중재(2): 문화와 역설관계의 그리스도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5)      중재(3):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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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 00] 강의 일정 및 참고자료  (0) 201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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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독교 세계관2012.09.08 07:21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신앙은 세계관적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지적인 변화이면서, 동시에 소소한 일상의 변화까지를 포함하는 흥미진진한 과정입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5회에 걸쳐 세계관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를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확인하는 큰 맥락과 만나게 됩니다. 90분 강의 후 30분 질의응답 시간이 있으며, 대학 교양강의 수준으로 진행됩니다.

 

일시: 201225-311일 매 주일 오후 4:00-6:00 (226일은 휴강)

장소: 워싱턴 나들목교회(University of Maryland, College Park campus)

등록 및 문의: http://www.nadulmokdc.org/  (MP. 301-919-9658)

 

 

1(02/05) “세상을 정복하려면 지도를 사라: 세계관 입문

2(02/12) “세계관은 이야기이다: 내러티브와 세계관

3(02/19) “세상을 전복하는 창세기 읽기: 구약의 세계관

4(03/04)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 나라 신앙: 신약의 세계관

5(03/11) “예수가 답이면 질문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계관: ”

 

 

강사: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

월간지 <복음과상황> 편집장을 지냈고, 한동대에서 기독교세계관을 7년간 강의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글과 강의로복음주의운동을 섬기고 있다. 최근에는 청어람-CBS TV 공동기획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였다. 현재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에서 책을 쓰며, 가족과 안식년을 갖고 있다.

 

 

 

 

추천도서

1.     <세계관은 이야기다> 마이클 고힌,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IVP, 2011)

2.     <이 책을 먹으라> 유진 피터슨 (IVP, 2006)

3.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트램퍼 롱맨 (IVP, 2006)

4.     <Jesus 코드: 역사적 예수의 도전> 톰 라이트 (성서유니온, 2006)

5.     <예수: BBC 다큐멘터리> 톰 라이트 (살림, 2007)

6.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브라이언 월쉬, 리차드 미들턴 (살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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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12.05.22 03:17




NT Wright @ Washington DC






지난 5월 9일(수) 오후 5시에 워싱턴 DC에서 톰 라이트 초청 강연이 있었다. 세이비어 교회의 부속 기관인 Servant Leadership School 이 주최한 행사였는데, 200여석의 좌석이 가득 찬 가운데 1시간 좀 넘게 강연과 질의응답이 이어진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톰 라이트의 강연을 직접 듣기는 처음인데, 그동안 동영상으로 여러번 보아왔던 것처럼 매우 달변에 쉼 없이 밀도 있는 내용을 이어가느라 시간이 짧다는 느낌이었다. 이번 강연회는 그의 새로운 책 How God Became King: The Forgotten Story of the Gospels (2012)의 내용을 주로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그의 전작 Simply Jesus: A New Vision of Who He was, What He did, and Why He matters (2011)의 내용도 함께 다루어졌다. 새로운 책의 요지는 쉽게 말하자면, 서신서의 예수가 아니라, 복음서의 예수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는 강연 첫머리를 "우리 가운데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 같다. 서신서 그리스도인(Epistles Christians)과 복음서 그리스도인(Gospels Christians)인데, 이 둘은 신앙생활의 형태, 강조점, 선호하는 내용 등이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자가 바울을 언급하며 회심, 칭의, 성령, 전도 등을 말하면, 후자는 예수와 산상수훈을 말하면서 정의, 십자가, 모범 등을 강조한다. 오늘 우리들에게 최대의 과제는 어떻게 이 둘을 조화시키고,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복음서가 그려내는 예수의 삶에 대한 생동감 있는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사도신경에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바로 건너뛰면서 예수의 삶을 통째로 생략하고 있는 것을 지적했다. 물론, 그는 신조(Creed)는 초대교회에서 논쟁점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용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에 관한 문제는 거의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누락을 이해할 수는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고 오는 세대가 예수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고 있다는 점은 성경의 거대한 드라마를 이해하는데에 매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강연은 종종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문화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세밀하게 잘 짚어내주었는데, 예를 들면, '정교분리' 원칙이 미국과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다고 하였다. 영국에서는 성공회 주교들이 상원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등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정치 참여가 제도적으로 확보되어 있는 상황인데,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의, 평화, 가난한 자에 대한 이러 저러한 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은 주로 '좌파'적 관점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우파'들이 '정교분리'를 들어 이런 흐름에 거슬러 논쟁을 한다는 것. 반면에 미국은 '우파'쪽에서 기독교 가치를 들고나와서 낙태, 동성애, 시장자유 등의 주장을 하기 때문에 '좌파'쪽에서 '정교분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각각의 경우에 '기독교적 가치'가 등장하지만, 그 근원을 성경의 어디에서 끌어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촌평을 곁들였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는 그 가르침과 지향점이 오늘 우리들의 성경 읽기에서 회복되고, 교회의 신앙적 가르침에서 강조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되살아나기를 강력히 촉구하면서 이날 강연회는 마무리 되었다. 


강연회 전에 그를 잠깐 만나 인사 나누면서, 내가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그를 대중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글을 썼다는 점과 최근에 나온 그의 책 Paul in Fresh Perspective (톰 라이트의 바울)에 추천사를 썼다는 것을 전하고 함께 사진 한 컷 찍었다. 그를 알고나서 10년이 넘어서 처음 조우를 한 셈이니,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런던에서 London Bible College (지금은 London School of Theology로 개명)에서 MA과정할 때, 그의 미출판 박사논문을 참고하며 공부했던 기억도 난다. 한국에 톰 라이트의 책이 좀더 밀도 있게 읽히고, 저변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월간지 '복음과상황'에서 했던 토론회 기사 하나를 링크해 둔다.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911


아래에는 한국어와 영어로 출간된 톰 라이트의 저술들을 찾아보기 쉽게 링크 걸어놓는다. 그의 everyone 시리즈와 설교집 등을 제외하고,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와 좀 진지한 학술적 저술들만을 골랐다. 관심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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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12.03.28 05:49



청어람아카데미는 CBS TV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강연회를 공동기획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6개월여만에 100여명의 강연자들이 무대에 서서 저마다 15분간 열강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청어람아카데미와 직접적 인연이 있는 분들의 강연만 모아보았습니다. 


1. "잘 사는 것 vs. 잘 살게 하는 것" 김동호 (열매나눔재단 이사장, 높은뜻교회연합 대표목사)



2. "한국교회를 살리는 3가지"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3.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은 반드시 옵니다"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4. "아깝다, 학원비!!" 송인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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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2011.10.10 18:39

랍 벨, 사랑이 이긴다(Love Wins) (포이에마, 2011)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랍 벨의 책 <사랑이 이긴다>가 국내에 발간되었습니다. 월간 <기독교 사상> 10월호에 청탁받아 쓴 저의 서평입니다. 좀 급히 쓴 감이 있는데, 이후에 토론회도 있었고 하니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합니다. 랍 벨은 얼마전 자신의 교회를 사임하고, LA로 이사해서 저술가와 강연자로 새 행보를 예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 할 수 있는 것과 말 할 수 없는 것”

Rob Bell <사랑이 이긴다> 서평



몇 달 전이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 출판계의 이상한 조짐을 접했다. 아직 출판도 안된 책에 대해 혹평이 속속 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은 속칭 ‘기독교계의 록스타’라 불리던 마스힐 바이블교회의 랍 벨(Rob Bell) 목사가 쓴 신간이고,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지옥’이라고 알려졌다. 포문을 연 사람은 크로스웨이 부회장인 저스틴 테일러, 그는 랍 벨을 일컬어 ‘거짓 교사’(false teacher) 노릇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이어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파 설교자 존 파이퍼(John Piper)가 “잘 가게, 랍 벨(farewell, Rob Bell)”라고 트위터에 올리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다. 개혁파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공연히 랍 벨의 이번 책을 이단시하였고, 자유주의(liberalism)나 보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으로 빠졌다는 등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최대의 악담으로 비난을 날렸다. 이 모든 일이 책이 아직 출판도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랍 벨(?), 혹은 출판사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유진 피터슨이 이 책을 옹호하는 추천사를 정면으로 썼다. 풀러신학교의 리차드 마우 총장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 책을 옹호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천국에 들여보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랍 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가?”라고 되물었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은 아마존 종합 2위까지 오를 정도로 대중적 주목을 얻었다.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책이 신속하게 번역되었고, 국내에 소개되었다. 출판사측의 고민은 양가적이다. 국내판에는 김영봉 목사의 ‘신중한’ 추천사가 비중 있게 실려있는 반면, 여러 매체에 등장하는 광고는 상당히 ‘공세적’이다. 우선 이런 식으로, 이식된 논쟁구도를 국내에서 재생산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란 점을 먼저 밝혀둔다. 미국 출판계의 트렌드를 좇아가며 책을 내노라면, 없던 문제도 만들어내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정작 중요한 우리 독자들의 관심사와 한국교회의 이슈들은 그만한 주목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이란 주제가 갖는 폭발성은 국내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옮겨 붙는다. 최근 적잖은 현장 사역자들이 감지하고 있는 요주의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천국’과 ‘지옥’이다. 교계 상층부가 온갖 스캔들로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저변의 탁류 중 하나로 내세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는 셈인데, 간단히 보면 한 십 년마다 찾아오는 유행 같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경향이 자주 포착된다. ‘천국 다녀왔다는 간증’, ‘지옥에 대한 살벌한 설교’가 적절한 종말론적 예언이나 신유집회와 섞이면서 거리낌 없이 증폭된다. 명동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깃발이 점점 대형화 되는 것은 사실 이런 저변의 흐름과 연관이 있다. 이런 대중적 말세신앙이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개신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국/지옥’ 논의는 단순한 신학적 궁금증을 넘어선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출판계는 <사랑이 이긴다>를 만났다.


 

그래서, “지옥”이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책 출판 전에 이미 논쟁의 구도가 이토록 촘촘하다면, 사실 책 읽기의 흥미는 떨어진다. 지옥론에 관한 이런 저런 신학적 논의 범주들 중에 저자는 어느 입장인지를 가늠하는 ‘증거 본문(proof text)’ 찾기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정작 책을 받아서 읽어 보니 정색하고 논쟁을 벌일 대목은 그리 많지가 않다. 오히려, 미려한 문장과 비유로 잘 짜여진 한편의 육성 설교를 접하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 많은 독자들이, 자신들이 묻고 싶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질문을 저자의 글에서 반갑게 만났다고 했다. 혹은 한때 의문을 가졌다가 지금은 덮어버린 질문을 다시 해보도록 격려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랍 벨의 책은 기독교인들이 제일 자신 있게 대답하던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되묻는데, 독자는 갑자기 무장해제가 되어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고 털어놓고, “나도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고 시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천국에 대해, 지옥에 대해, 구원에 대해, 교회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묻는다. 그냥 묻는 것도 아니고, 행간을 넓게 벌려놓고, 잠시 생각한 다음에 답하도록 기다려주기까지 한다.
 


그가 지금 문제 삼는 것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확신 있게 휘두르는 심판의 칼부림을 대체 어디서 배워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에 따르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꾸짖고, 깨우치는 내용이 바로 그런 그릇된 구원 이해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는 자신이 비난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평생 집을 지켰던 큰 형이 느꼈을 노여움과 유사하다.
 


랍 벨은 천국과 지옥의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비교종교학적 논의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경 내의 주요한 개념과 비유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면서 그 대비를 한껏 부각시켜 준다. 먼저는 ‘영생(eternal life)’는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이란 의미가 아니라, ‘다른 세대(age) 혹은 시대에 속한 생명’이란 의미라고 되새겨 준다.(제2장) 이를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란 공간적 이동의 이미지로 주로 묘사되는 천국/지옥 개념이 시간적 개념으로 재인식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세대를 뜻하는 ‘아이온(aion)’의 의미를 잘 새겨놓은 것도 유익하다. 서로 다른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시공간 속에 포개어진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성의 양상으로 천국과 지옥을 생각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이는 후반부의 '돌아온 탕자' 비유의 해석에서 다시금 재적용 되는데, 똑같은 사건과 상황 속에 놓여있지만 어떤 자기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는 천국의 메시지가 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의 메시지가 된다.
 


또한, 그는 ‘지옥(hell)’으로 종종 번역되는 성경의 주요 구절들에서 사용되는 용어, 구약의 ‘스올’과 신약의 ‘게헨나’ 등의 용례를 살펴보면서, 정작 내세적 의미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오히려, ‘저 세상으로 유보된 지옥’이 아니라, ‘이 땅에서 지금 체험하는 지옥’을 상상할 수 있어야 성경의 메시지에 더 잘 반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제3장) 랍 벨은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미치는 범위와 영향력을 재평가 하도록 요구한다.(제4장 이후)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전혀 뜻밖의 사람들까지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더욱 집요하고도 철저한 회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감히 말하자면 ‘지옥’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거는 책이 아니다. 기존의 지옥 논의에 어떤 결핍과 결함이 있는지를 논증하는 작업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더 심오한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바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 자체를 묻는 것이다. 그동안 ‘천국/지옥’ 이야기로 쉽고 편하게 ‘구원’을 독점적으로 논하던 시절을 뒤로 하고, 불러낼 질문들 다 무대에 올려놓고서도 전개할 수 있는 구원론은 대체 어떤 모양과 내용으로 나타나야 하겠느냐를 묻자는 작업이라고 보아야 옳다. 천국과 지옥을 굳이 내세로 넘겨놓지 않아도, 지금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삶의 현장에서 씨름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 때로 미묘하고, 자주 미끄럽고, 종종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흑백논리로 살균방부 처리된 단순한 평온으로 도피하지 않고 삶을 맞이하고자 할 때 신뢰할 수 있는 대화의 파트너가 되려면 어떻게 이런 질문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 말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

그간 지옥/천국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그림 용어들의 제한성을 되새겨 준 것도 좋았다. 영원한 고통(eternal torment), 꺼지지 않는 불(unquenchable fire) 등의 이미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상으로 여겨져 왔다. 한동안 ‘수정주의 지옥관’이라며 논란이 되었던 영혼멸절설(annihilation)은 몰트만에 따르면, 사실 지옥의 부재를 말한다기 보다는 고전적 지옥관이 갖고 있는 중세적 이미지를 좀더 현대적 개념으로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마치 천국 다녀왔다는 간증에서 길은 황금으로, 집은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거나, 믿음의 크기에 따라 집(mansion)의 평수가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갖는 모순성과도 유사하다. 이 땅에서나 의미 있는 보석류와 집 크기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비교의 잣대로 유효하다는 말이 되는 셈인데, 그것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천국 자체가 어떤 곳인가를 말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랍 벨의 메시지에는 ‘어느 정도’ 보편주의적 전망이 엿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심술궂게 묻고 싶어진다. 보편주의적 전망을 갖고 있으면 안 되는가? 흔히 배타주의(exclusivism), 혹은 특수주의라고 불리는 관점만이 유일하게 옳은가? 구약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써 내려온 구약의 서술이 순간 순간 멈칫하며 비약하는 대목을 만난다. 이사야가 그랬고, 수많은 다른 선지자들이 그랬다. 그날에는 모든 이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서 말이다. 종종 선민 이스라엘이 고꾸라지고, 이방민족이 쓰임 받는 순간들을 만난다. 언약백성의 반열에 당혹스런 이방인들이 적잖게 끼어있다. 구약은 매 순간 일방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종종 선민의 버림받은 처지와 이방인들이 역설적으로 믿음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상황을 돌출적으로 드러낸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더 하다.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이방인 선교를 놓고 정면 대립했다. 성경의 특수주의는 보편주의적 전망 안에서만 유효했다.



물론, 우리의 균형감 있고, 체계화된 신학은 이런 보편주의에 오래 머물지 않고, 명료한 구원론에 바탕을 두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감당할 선교적 과업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바 된 ‘흑암에 머무는 저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을 끓어오르게 한다. 우리의 보편은 언제나 특수주의의 확장으로서만 정당화 된다. 전도나 선교를 경유하지 않고, 만민에게 나아가는 법이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성경은 종종 우리를 놀래키지 않는가 말이다. 성큼 만민을 복음의 대상으로 포괄해버리지 않는가? 오히려 구원받았다는 선민들이 버림받을 가능성이 더 집요한 의문거리 아니었는가? (로마서 9-11장) 나는 랍 벨의 책에서 아직 기독교 설교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 그 통찰이 성공적으로 포착된 것을 보았고, 이것이 그의 책이 성취한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 (그의 전 작품인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의 영어제목이 <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 였다.) 구원의 가능성이 선민들 내부에서 역전될/된 상황을 정직하게 관찰하고, 이를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기대치 않았던 외부세력들에게 구원의 여지가 조건 없이 개방되어 버리는 현상을 당하는 것. 예수의 비유에서는 자주 이런 역전이 벌어졌고, 그것이 당대의 신심 깊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도무지 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세리, 창녀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구원을 위해 경건한 삶을 추구해 온 바리새인, 서기관을 다 내모는 논법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이지, 자존감에 흠집이 난 유대인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되새김질 해야 할 사람들 아니었던가? 랍 벨은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을 따름이다.



성서학자들은 성경이 어느 한 주제로 깔끔하게 재단되지 않음을 솔직히 인정해왔다. 좀더 정직한 접근이라면, 자신이 선 신학적 입장의 주조음 위에 끊임없이 변주되고, 이탈하는 소리가 성경 안에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랍 벨은 특히나 배타주의적 구원관 위에서 ‘천국/지옥’을 손쉬운 출입문 삼아 구원을 말해온 ‘복음주의/근본주의’ 신앙인들에게, 성경이 집요하게 전달해 온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가 친숙히 여겨온 것보다는 훨씬 크고, 때로 낯설고, 어떤 경우는 당황스러운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복음주의/근본주의’ 혹은 ‘개혁주의’와 굳이 배치되는 것이라 볼 수 없다는 얘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흔쾌히 동의한다. 랍 벨의 이 책을 나는 기쁘게 추천한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전 <복음과상황>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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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주의2011.10.10 16:59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자를 기리는 44인의 회고록 (IVP, 2011)




한국IVP가 펴낸 <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자를 기리는 44인의 회고록(John Stott: A Portrait by His Friends)>(IVP, 2011)은 원래 그의 친구 35명의 글이 실려있는 책인데, 한국판에는 한국 필자들의 글을 9편 더 실어서 44명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래는 그 책에 실린 저의 원고입니다.

 

존 스토트, 복음주의 운동가

John R. W. Stott, an Evangelical




존 스토트의 별세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얽힌 추억을 되새긴다. 그의 책뿐만 아니라, 그와의 작은 만남과 기억이 이토록 다양하게 회상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내게도 그는 단지 책 속의 인물 이상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를 직접 만나 인터뷰 했던 기억도 있고(<복음과상황> 2002년 1월호에 수록), 그의 영향력이 영국 복음주의운동에 드리운 폭과 깊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감하기도 했다.


그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대학 1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읽었지만, 흔히들 접하는 신앙서적처럼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고 좀 무미건조했다고 기억된다. 정작 그의 책에 맛을 들인 것은 성경공부를 위해 추천받은 <성경연구 입문>이었고, 성경 본문 공부와 묵상에 맛을 들이면서 영어공부를 겸해 선택한 그의 <산상수훈> 강해였다. 로이드존스의 장황한 스타일에 비해 그의 간명한 스타일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어서 읽어나간 그의 강해집들은 성경연구의 어떤 기준을 잡아주었던 것 같다. 본문과 상관없는 장광설에 별 감동이 없고, 웃기는 예화들로 점철된 설교가 그닥 흥미롭지 않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때 존 스토트의 설교집을 만나고 탐독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1995년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런던의 올소울즈 교회를 방문해서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영어가 서툰 내게도 그의 설교가 얼마나 정갈한 언어와 명료한 논리로 이어지던지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의에 눈을 뜨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학 때부터 시작된 나의 복음주의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의 아마도 8할은 존 스토트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무언가 기준과 판단이 필요하면 우선 그의 글을 찾아보았고, 언제나 도움을 얻었다. 물론, 내가 그의 일방적 추종자가 된 것은 아닌데, 종종 나는 그가 좀 더 과감했으면 했고, 그의 성경해석이 좀 더 전진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를 살아온 복음주의자들 대다수에게 하나의 시금석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다. 한국 복음주의, 특히 청년운동도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영향력은 전모가 잘 전달된 것일까 묻고 싶다. 그를 탐독한 광범위한 독자군을 염두에 두고 존 스토트의 수용과정과 그 영향력을 꼼꼼히 따져보는 작업은 별도로 반드시 필요할 듯하다. 내가 이 길지 않은 글에서 오히려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제 그의 죽음과 더불어 서둘러 닫히고 말 존 스토트 읽기의 빈구석과 맥락을 과제로 적시해서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나는 굳이 이 내용을 객관적이거나, 공적인 문체로 쓰기보다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성찰의 틀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첫째, 그는 나에게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전통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최근 국내 언론 지상에 ‘복음주의’란 용어가 많이 오르내리지만, 거의 대부분이 미국적 상황과의 관련 하에서 나오는 경우들이다. 나는 존 스토트를 통해서 영국 복음주의 전통을 소개받았고, 매력을 느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의 신학공부를 미국이 아니라 영국을 택한 이유도 거의 전적으로 그 영국 복음주의를 직접 호흡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말하거니와, 영국 복음주의에서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는 그토록 희귀해진 ‘지성운동’의 면모가 영국에는 살아있고, 다양한 실험과 행동의 공간이 영국 복음주의에는 꽤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영국 기독교는 죽었다’는 선언을 무책임하게 해댈 때, 사실은 한국 기독교가 아직 가보지도 못한 수준의 부흥을 경험했던 그 나라의 복음주의 전통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는 전혀 무지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개교회의 크기만 가지고 비교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나는 영국 복음주의 운동 내부에서는 매년 부활절 기간이면 7-9만명이 모이는 ‘스프링 하베스트’ 같은 수련회가 열리고 있으며, 여름에는 1만 명이 넘는 바이블캠프들이 이곳저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다. 15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수련회 운동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싶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구호기금이 영국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표적인 제3세계 구호단체 역할을 한다는 것도 짚어줘야 하리라. 그리고, 이 모든 영국 복음주의의 르네상스에 밑그림을 그린 대표적 인물이 존 스토트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세가 꺾이고, 무언가 갱신의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영국 복음주의 전통은 다시한번 재검토 될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둘째, 그는 나에게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국서 공부하던 기간에 한번 그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미리 편지를 띄웠고, 시간을 정해 찾아가 만났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런던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교회 근처에 있는 그의 집은 저택이 아니라 여느 사람들의 집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플랫(Flat)이었다. 그는 종종 외국 유학생들이나 영국 젊은이들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도록 하기도 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전액 제3세계 유학생들, 특히 신학생들을 돕는 랭함파트너십(Langham Partnership)으로 들어간다. 최소한의 생활기반 외에는 사실상 거의 무소유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내가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읽어 보았던 듯, 그는 편지에 썼던 내 가족의 안부와 학업의 진척을 물어주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상에 대한 자의식이나 존재감이 도대체 느껴지지 않는 소탈함이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고, 그 자체가 울림이 큰 메시지였다. 나는 목회자들이 너무 위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바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자신감에 가득 차 있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목회자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겠지만, 존 스토트를 만나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그는 한 교회에서 60여년 간 목회를 하고 은퇴했다. 그 교회는 여전히 메가처치(mega-church)가 아니다. 그는 성공회 내의 위계질서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많은 유력한 단체나 기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알뿐 아니라, 그 자리를 다른 무엇에 빼앗기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행복한 목회자였다.



셋째,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존중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이며 얼마만큼의 무게인지를 삶에 실어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사역 과정에 몇 번의 논란을 거쳤다. 아마도 가장 최초의 것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대학진학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기,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느꼈고, 목회자후보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대체복무를 선택함으로써 군의관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와 심각한 가정불화를 겪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정당한 전쟁론’으로 수정함으로써 이 논쟁에서 이론적으로는 벗어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갈등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목회하던 초창기인 60년대에 영국 복음주의권에서는 ‘은사주의’ 논란이 일어났다. 방언과 예언 등 은사주의 현상이 그의 교회에서도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존 스토트가 어떤 입장을 내어 놓을지 궁금해 했다. 그는 1964년에 성령론에 대한 책 <성령세례와 충만>을 통해 이후 복음주의권의 표준적 견해로 여겨지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논쟁을 정돈했다. 반면 한참 후인 1988년에는 ‘자유주의자’ 데이빗 에드워즈와의 대화를 엮어낸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지금도 이슈가 되는 ‘영혼멸절론(annihilation)’을 제기함으로써 문제 제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견해는 복음주의 신약학자 존 웬함(John Wenham)의 영향도 있었다지만, 역시 그 나름의 성경 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단순한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기대를 할 때, 종종 그는 그 기대를 깨고 더 나아갔다. 혹은 반대로 더 나아가주기를 기대할 때, 단단히 머물렀다. 그는 성경이 자신을 이끈다면, 혹은 신학적 사유가 그를 밀고나간다면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가보지 않은 길도 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1974년 로잔언약이 애초 예상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강력한 사회참여의 내용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해 초 존 스토트가 직접 남미로 가서 르네 빠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등 남미의 복음주의자들과 대화하면서 서구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협소한 시야를 넘어서고자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열매였다. 그의 말년으로 오면서 그의 시야와 사고의 범위는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1999년에 낸 <복음주의의 기본진리>는 복음주의권에게 던지는 하나의 유언과 같은 책이라 볼 수 있는데, 서문에서 그는 자유주의자들, 동방교회 등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배울 것이 많고, 배워야 하는지를 결코 가볍지 않게 이야기 한다. 그의 과거 저술을 통해 그를 복음주의권의 대변자, 논객으로만 기억하던 이들의 눈에는 범상치 않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를 복음주의 진영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변화할 자세를 갖고 있었던 한 ‘제자’로 기억한다면 그보다 더 웅변적으로 ‘신실한 순종’을 배울 롤 모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넷째, 그는 무엇보다 전도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복음은 자신을 위한 복된 소식일뿐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도 그러하다는 신념을 갖고 평생 살아왔다. 그에게 복음은 기꺼이 전하고 싶은 ‘기쁜 소식’이었다. 그가 영국 복음주의권에서 일약 활동폭을 넓힌 것은 아마도 1954년 한달간 진행된 빌리 그래함의 역사적인 런던 헤링게이 전도집회 때였을 것이다. 영국 복음주의권에서 빌리 그래함에 대한 인식이 썩 호의적이지 않던 시기였는데(로이드존스도 부정적 평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전도집회의 대성공으로 빌리 그래함은 일약 전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주목받게 된다. 그때 그는 빌리 그래함과 적극 동역하였고(이것이 1974년 로잔대회를 비롯 빌리 그래함과의 평생에 걸친 동역으로 이어진다), 그 자신도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 층을 위한 전도자로 평생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가 현대사회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도 그것이 해명되지 않고서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내용으로 복음이 전달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가 말하는 “이중적 듣기”(double listening)은 한편으로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소리를 새겨듣는 자세를 뜻한다. 그는 결코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강변하면서, 세상을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더디고 힘겨운 작업을 경시하지 않았다. 사회참여는 복음전도의 시급성 때문에라도 더욱 긴급하게 수행되어야지, 복음전도를 위해 생략될 수는 없다는 것이 존 스토트가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웅변으로 전달한 메시지이다. 



다섯째, 그는 복음주의 지성운동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다. 존 스토트가 등장한 시기는 영국 복음주의권의 대약진 시기와 일치한다. 원래 복음주의자란 영국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비국교도(non-conformist)이자, 블루칼라층으로 대변된다. 즉,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성공회 출신이 아닌 기독교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단순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설교를 선호하고, 쉽게 선동되고, 체제나 권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반골기질이 있는 이들로 그려진다. 이런 전형적인 그림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확연하게 변모한다. 대학생운동을 해오던 UCCF(한국에는 IVF로 알려진)쪽에서 복음주의 성서학자들로 진용을 꾸려서 성경사전(New Bible Dictionary)을 편찬하는 등 매우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지성적 면모를 일신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울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졸업한 성공회(anglican) 출신의 복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마이클 그린, 제임스 패커 등과 더불어  존 스토트도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들인데, 당시 이들의 신앙강연을 듣고 자란 이들이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 같은 그 다음세대 인물들이다. 특히나 성경의 권위를 중시했던 복음주의권의 특성으로 인해 유능한 성서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워드 마샬, FF 브루스, 리차드 보컴, 앤터니 티즐턴, 고든 웬함, 제임스 던, 톰 라이트 등의 등장이 복음주의권의 성서학 중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한 세기만에 복음주의운동이 블루칼라 중심의 반지성적 대중운동이란 이미지에서, 잘 교육받은 이들이 심사숙고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기반이 있는 신앙운동이란 인식을 얻게 된다. 단순히 경제적 중산층의 유입이 많아져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인식이 아니라(나는 미국의 복음주의는 이 경로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복음주의자란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고, 지적으로 존중받을 만한 신앙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게 된 것은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존 스토트의 일대기, 혹은 그의 저작들을 읽다보면, 그가 살아오면서 고민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나는 그의 질문이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고, 그의 대답에 잘 설득되곤 했다. 90 평생을 한결같이 걸어온 한 사람이 떠나고 난 후의 족적을 되짚어 보노라니, 이제 그가 하던 질문을 던지고, 그가 내놓을 법한 대답을 찾는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빈자리가 커 보이고, 남겨진 몫이 무겁게 느껴진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전 <복음과상황>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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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해체 운동이 예상보다 크게 초기 호응을 받으며 한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로 내다 보이는 다양한 풍경이 있다. 

최근 CBS에서 토론회가 있었다. 참석자는 손봉호 교수, 김경원 목사(한목협, 서현교회), 정성진(거룩한빛광성교회), 나이영 기자(CBS) 등 이었다. (관련기사) 예장 통합측의 원로들 초청 좌담도 있었다. 참석자는 림인식 목사(증경총회장), 김순권 목사(증경총회장), 김정서 목사(총회장), 손인웅 목사(한목협 회장), 조성기 목사(사무총장)이었다. (관련기사) 그외에도 이런 저런 자리에서 나오는 다양한 발언들을 접한다. 그러다 보니 불현듯 어떤 행태지도가 그려진다. 대략 아래와 같다.


1. 분위기 살피는 관망파
그동안 가장 쉽게 나오던 논리는 "해체는 과격하니, 개혁을 하자"며 주로 '리모델링'론을 내어 놓는 경우였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경우 정보접근의 차단이나 나이브한 상황인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미 있는 조직을 해체하기는 왠지 파괴적"이란 정서에 손쉽게 기대는 이 입장은 상황전개에 책임있게 반응하지 못하고, 힘있는 어른들의 눈치나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판단을 마냥 온순한 얼굴로 기다린다. 이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가슴 아파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파하는 자신을 보며 감동받는' 나르시시즘 놀이를 하고 있을뿐 실제 상황 전개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2. 분위기 모르는 막가파
해체를 반대하며 가장 강력하고도 어이없는 성명서를 낸 '예장 합동교단'의 지도부가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코멘트 참고: "예장 합동, 어이없는 광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겠지만,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는 이들이 지도부를 형성할 수 있는 조직은 미래가 매우 암울하다. 

물론 해체 찬성론자들 가운데에도 막가파들이 있을 수 있다. 정보가 모라자고, 생각이 짧은 가운데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경우는 언제나 이런 리스크를 안을 수밖에 없다. 해체 찬성론에 편승하고 있는 '신천지'쪽은 그런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은 해체찬성론 막가파 쯤에 해당되겠다. 한기총 해체에 찬성한다고, 그들의 존재가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3. 홀로 순수파
속 시끄러운 논란과 거리를 두고, 고고한 영성의 성채나 교리의 감옥으로 들어앉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보인다. 오염되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들이다. 앞으로도 오염될 일이 없는 플라스틱 재질의 신앙인인 이들에게는 한기총 해체니 유지니 하는 논의가 다 부질없는 짓이라, 한 몫에 끌끌 혀를 차고 마는 것으로 소회를 대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뭐, 이것도 한 방법이니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미더워보이지 않는 것은 현실을 바꾸어낼 능력 입증하기를 원천적으로 포기하는 그 현실체념적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을 포기한 덕에 이상을 얻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를 현실 탓을 하면서 유보시킨다. 현실을 외면한 댓가로 이상이 얻어지지는 않는다.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신앙이 이상적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 주지 못한다. 그건 정신승리법에 불과하고, 사실은 자기기만의 또다른 버전이다.


4. 똥폼 잡는 대안세력
가장 견딜 수 없는 이들은 어느새 대안세력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며 포지션을 선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개탄하며, 앞으로 연합기구를 어떻게 합치거나, 분리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구상한다. 누구에게 지분을 좀더 줘야 안정을 찾을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그게 우습다. 한기총이 왜 문제였냐면, 한국 개신교인들이 준 적이 없는 '개신교 대표성'을 참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새 슬그머니 그 운동장에 올라와 몸을 풀고 있다. 조만간 경기가 시작되면, 자기는 이미 여기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포지션을 당연히 배정받거나, 주장 완장을 차야한다는 논리를 펼칠 태세다. 


민심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련기사) 손봉호 교수는 시사지 인터뷰와 한기총 해체 주장의 중심에 서게 된 이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메일과 전화를 받고 있단다. 우려했던 항의나 반박 내용은 거의 없었고, 너무 고맙다, 개신교 떠날 생각이었는데 맘 다시 잡는다 등 구구절절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뜨겁게 반응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지금 한기총에 대한 대중적 여론과 민심은 교계정치에서 대표선수 갈아치우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당신들의 정치게임을 그만 두라는 얘기이다. 합동측 천박하고 무식하다고 욕하지만, 통합측의 욕망이 과연 그만 못할까? 이번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통합측의 운신 폭이 넓었을뿐, 공격과 수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거론되지 않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돈을 주었다는 사람은 있는데, 돈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안 나왔다. 한두푼이 아니고, 한두번이 아니다. 역대 한기총 회장 선거가 모두 돈선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경회장의 발언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 부분을 문제 삼아야 한다. 한기총 돈선거를 회개하자는 둥, 개탄할 일이라는 둥, 말잔치는 풍성한데 과연 이 문제가 길자연 목사 개인의 문제이며, 이번 한번의 문제인가? 그게 아니라면, 돈 받아먹은 총대들(과거 선거때 총대로 갔던 사람들 명단이 다 있을 것 아닌가?) 한 사람씩 대질심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일반 선거법에서는 금품향응 받은 사람들 50배씩 물리게 되어 있는데, 한기총 선거는 수십억씩 돈이 돌아다녔는데도 준 사람은 있고, 받은 사람은 없는 해괴한 상황이란 말인가? 각 회원교단과 단체는 총대들 대상으로 조사를 시작했는가? 

지금 한기총 관련 논의에서 눈치를 보는 이들이나, 막무가내로 내달리는 이들이나, 뒤늦게 균형잡힌 대안세력처럼 등장하는 이들이 모두 한 때는 한기총 선거 막전막후에서 뒤섞이고, 어울리던 그때 그 사람들 아닌가? 대안을 말하고, 개혁을 입에 올리려면 가장 핵심적인 사안... 추상적으로 회개한다 말하지 말고, 그래도 한국교회 대표기관은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일반론에 편승하지 말고, 핵심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해야한다. 돈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흘러갔으며, 그 댓가로 행사한 투표권은 무슨 결과를 만들었나에 답해야 한다.  

최소한 돈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참회를 해야" 해결에 이른다. 어떻게 해야 이런 고질적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구조적, 제도적 대안을 만들 수 있는지 얘기를 해야지, 지금 새로운 연합기관 구성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이런 상황이 뻔히 보이니 '해체'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한기총 총대급 이상 교단 및 연합기관 관여자들 전체가 지금 불신임 당한 것이다. 이를 얼버무리지 말라. 이들은 일괄 해임 대상이다. 각 교단과 단체는 총대들 전원 소환해서 금품수수 여부부터 조사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기구를 해체하는 작업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누가 당신들에게 새로운 조직을 만들라고 임무를 주었나? 지금 이들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는 이상한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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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지 W 부시의 한국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한다.
이번 참에 국제적으로 사법정의를 한번 제대로 세워보자. 

그를 초청한 이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환대하고자 하겠으나, 나를 비롯한 또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의 방한이 위기에 처한 국제사법정의가 한번 곧추 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아 그의 방한을 열렬히 환영하고 기대하는 바이다. 

사실 부시가 처한 미국 및 국제적 상황은 좋지 않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고선 측은심을 느낄 정도이다.


첫째, 그는 "대량학살(mass murder)"의 주범으로 기소될 처지에 놓여있다.

찰리 맨슨이란 희대의 살인마를 기소하였고, 여러권의 베스트셀러를 펴낸 스타 검사 빈센트 버글리오시 (Vincent Bugliosi)는 직접 자청하여 조지 W 부시를 비롯한 그의 각료들,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zza Rice) 등을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집단살인의 범죄자로 기소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4,000명이 넘는 미군과 100,000명을 넘는 이라크 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인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공개된 트레일러를 보면 이 사안에 대한 법률적 검토는 매우 직관적이고, 단순명료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대중들의 정의감과 법감정에 충실하다. 이라크전쟁에 동원되어 죽어간 수많은 미국 시민들의 분노와 이라크에서 죽어간 무고한 생명에 대한 양심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이 캠페인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시 지난 8년간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 특히 전쟁과 관련한 그들의 책임성을 벗기 힘들 것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둘째, 그는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비인도적 범죄로 고발된 상태이다. 

이 고발은 간단치가 않다. 하버드 대학 국제법 교수였고, 이 분야의 권위자로 현재 일리노이대학 국제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프란시스 보일(Francis A. Boyle)은 이미 ICC에 부시에 대한 체포를 집행하라고 요청하는 서류를 2010년 1월에 접수한 상태이며, 온라인상에 이를 지지하는 캠페인이 다수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2009년 2월 ICC에서는 수단의 전 대통령 알 바시르에 대해 인종학살 및 비인도적 범죄를 이유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부시가 민간인 신분으로 캐나다 캘거리에 강연을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캐나다 내에서는 ICC의 이중잣대를 비판함과 더불어, 캐나다 정부가 부시가 입국할 때 그를 체포하여 ICC에 회부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ICC의 조약은 현재 전세계 139개국이 서명했고, 111개국이 비준한 상태이다. 가장 강력한 예외가 미국이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이 2000년 12월 31일 조약에 서명했으나, 차기 정부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년 5월에 이 조약을 무효화하였고, 계속해서 미국 예외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시민과 군인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와 조사를 받지 않을 면책특권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에 대한 적용을 막고 있다. 이는 미국이 전세계적으로 다국적군이나 유엔 평화유지군의 형태로 개입하고 있는 군사행동이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함이며, 특히 이 시기 시작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자하는 데에 핵심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 사이트)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취지에 비추어 볼 때, 전세계 어느 나라에 있든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 범죄에 대한 처벌은 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고, 특히 그들이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나라를 떠나 ICC 가입국가의 영토로 들어올 경우에는 해당 국가가 체포 및 조사 등의 법집행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이번 부시의 한국 방문에 우리가 환영해주어야 할 방법은 매우 선명한 듯하다. 

1) 부시를 초청한 목사님들은 이번에 좀 단단히 회개하시고, '평화'에 대해 간증하기에 전세계에서 가장 부적절한 인사를 섭외한 것에 대해 대교회,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 더욱이 대형교회들 중심으로 무고한 성도들을 동원하는 구태의연한 행태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2) 부시 본인은 이번 한국 나들이를 좀 유의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그의 한국 방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평화에 대해 참 소홀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평화운동, 특히 한국전쟁을 넘어서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언가 기여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식을 많이 각성시켜주었다. 그가 온다면 많이들 환영하고, 국제정의를 세우기 위해 적극 나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듯하다. 참고하기 바랄뿐이다. 

3) 한국사회와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좀더 특정해서 개신교인들)은 이번 6.25를 포함하는 기간을 다시 평화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다행히 몇몇 단체들이 크고 작은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니, 이와 관련해서 초대형 이벤트가 아닌 일상과 삶으로 녹아든 대안을 적어도 하나 이상 참여하는 것으로 해보면 좋겠다. 아래에서 하나 선택하는 것도 한 방법.

아임쏘리 운동: http://imsorry2010.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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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건축 예정 본당 내부 이미지


누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가?


 

양희송: 청어람 아카데미 대표 기획자

 

최근 사랑의교회 건축을 둘러싼 논란의 아래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잠복된 한가지 이슈가 있다. 소위 말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어떻게 규정하며, 누가 부여하며, 언제 소멸되는가하는 점이다. “한국의 대표적 교회로서… 그래선 안된다”든지, “한국교회를 위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등 사랑의교회 논의는 자칭타칭 ‘한국교회 대표성’을 공공연히 전제하고 이야기 되는 경향이 있다.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동원되는 ‘한국교회 대표성’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겨났고, 언제 소멸되는가?

 

가만히 보면, 이 논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치영역에서는 비극적 최후를 맞은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불러온 사회적 파장과 추모의 분위기, 종교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으로 이어진 거대한 존경과 애도의 물결을 보면서 자괴심에 빠져드는 개신교권의 조바심과도 맞물려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누가 죽어야 저런 애도를 받을까?”라고 철없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 개신교는 무엇으로, 혹은 누구에 의해 대표되는가?

 

물론, 이것이 왜 중요하냐 반문이 가능하다. 가능할뿐 아니라 정당하기까지 하다. 한 종교계 전체를 한 사람, 혹은 한 기관으로 환원해서 호불호를 판단하는 것은 종교 그 자체의 존재가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유명인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그의 개인적 실수와 한계에 함께 갇히곤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 아니던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이미지 정치’의 이면에 대한 비판적 응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개신교권 내에서 보이는 ‘대표성’을 향한 교계의 갈구와 이를 위해 동원되는 논리나 메커니즘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런 노력들의 덧없음을 들여다보노라면, 도리 없이 ‘큰 어른 하나로 족한데’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 되어 버리긴 한다.

 

 

‘정치’로 얻는 대표성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 탄탄한 ‘민주정치적 구조’를 가꾸어 왔다. 언제나 회중 전체의 총의(總意)를 물어서 이를 대표자에게 적절하게 위임하는 구조를 가동해왔다. 그것이 때론 감독제의 형태를 띄건(감리교 등), 대의제로 나타나건(장로교 등), 회중정치(침례교 등)로 발현되건 말이다. 직분은 기능(function)이지 지위(position)은 아니었다. 칼뱅의 초기 장로교 제도에서는 장로직 임기가 일년이었다고 한다. 매년 새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영속적 지위가 아니었고, 단지 어떤 역할에 주어진 명칭이었다.

 

이러하기에 한 교회에서 관철될 수 있는 정당한 대표성은 (장로교라면) 장로를 제대로 뽑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개신교가 교황제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원래적 맥락을 존중한다면, 직제는 종신직이 아니라, 임기제로 하는 것이 개신교 정신에 맞다. 목사나 장로나 적절한 임기를 설정하여, 그 역할을 갱신하게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우리 사회가 당연시 여기는 민주주의적 관행과 제도의 상당 부분이 근대 종교개혁 과정에서 성립하였기에 이를 지적해서 ‘세속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얼굴에 침뱉는 행위가 된다. 이런 제도의 운영이 낯설어진 한국 개신교 상황을 반성하고 탓해야지, 제도 자체를 기독교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탓하는 것은 ‘의도된 무지’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교계에서 종종 벌어지는 ‘금권 선거’의 문제는 사실상 개교회에서 민주적 훈련이 안된 이들이 빚어내는 꼴불견이다. ‘정치’를 ‘권력의 획득’이란 가장 저급한 차원에서만 생각하기에 이들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권력’을 놓고 용쟁호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이란 것은 곧 ‘이권’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은 ‘정치’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되는 이유이다. 수억 원씩 총회장 선거에 밀어넣고 당선이 되었을 때, 그들이 챙길 수 있는 ‘이권’이 비록 몽땅 현금화 되는 것은 아닐지언정 자신에 딸린 지지세력의 앞배와 뒷배를 봐주는데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이 모든 ‘이권 행사’를 ‘사심 없는’ 전도와 선교 사역으로 포장하느라, 범법행위를 ‘종교자유에 대한 훼손’으로 짐짓 각색하느라 늘 교단정치는 바쁘다. 물론, 이 상황은 교단에 따라 양상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좀 잠잠하다 싶은 교단 총회장 출신들이 ‘한기총’ 같은 연합기구 선거에 열심을 내는 것을 보면 ‘권력욕구’와 ‘이권추구’는 전혀 식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대표성이 없는 조직들이 ‘한기총’을 비롯한 소위 ‘연합기구’이다. 이들 조직은 개별 성도들에 의해 정당한 위임을 얻어내기에는 너무 다단계의 절차를 거치기에 조직의 토대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상 임의기구에 불과하지,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 대변한다고 말할만한 제도적 기반이 없다. 어떤 정치체제도 과도하게 위임해서 설립된 기구에게 중요한 대표성을 맡기지 않는다. 직접 선출하지 않은 권력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UN에 각국이 참여하지만, UN이 ‘세계정부’는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들은 늘상 ‘한국 개신교’를 주어로 온갖 성명서를 내어놓는다. 이들의 논의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대중들의 여론에 부응할 때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언제나, 부여한 적도 없는 대표성이지만 ‘상징적’으로나마 허용했던 것을 마음으로 거둬들여버리게 된다. 그런데도, 계속 대표를 사칭해서 무언가 자기 이익을 취하게 되면 대중으로부터의 대대적인 소환과 불신임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명의도용이요, 대표성 사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정치적 대표성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더 효율적이다’는 식의 논리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개신교가 자신들의 실패를 반성하고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이 비판했던 천주교적 구조를 찬양하고 그리워한다는 사실. 어쩌면, 여러 개신교 목회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작은 교황’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규모’로 얻는 대표성

이전투구식의 정치의 장에 들어가기 꺼리는 이들이 선택하는 우회로가 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처럼, 교계의 정치구조 바깥에다가 큰 판을 펼치면 거기서도 대표성이 형성된다. 교단정치와 따로 놀면서 교회를 크게 일군 경우이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지구촌교회 등 소위 ‘복음주의’ 교회들만 이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니다. 이단시비를 받았던 연세중앙교회, 만민중앙교회, 성락교회 등은 초대형으로 규모를 키우면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이즈가 중요하다(size matters)’는 세간의 논리를 입증해준 경우들이다. 후자에 속한 교회들은 기성교단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이런저런 모양으로 기성교단에 참여하거나, 교계 연합운동에 기여함으로써 부담스런 꼬리표를 떨어버리고 싶어한다. 또한 교계 일각에서는 이걸 이용해서 종종 이들에게서 인력과 재정을 이끌어내는 세력들이 있다.

 

전자에 속한 ‘초대형 복음주의교회들’은 요즈음에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세대교체 시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 기성교회들이 보여준 ‘교단정치’에 대한 불신감에 기반을 둔 ‘정치 없는 대표성’을 획득하였다. 이 교회들에 다녀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암묵적으로 ‘우리야말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자긍심이 있다. 이들 교회의 목회자가 단지 개교회 목회자로 그치지 않고, 교계정치가 아닌 방식으로 한국 개신교 전반에 영향력을 강하게 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통로는 도처에 만들어져 있다. 수천 명의 목회자들을 모아낼 수 있는 컨퍼런스, 출판사, 네트워크를 직접 가동하고 있고, 이들의 설교를 듣고, 책을 읽는 수많은 평신도 그룹, 해외의 주요한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교류 등 그로부터 형성되는 ‘가시적인 대표성’이 여기에 실재하고 있다. ‘교계정치’란 루트를 선택하지 않은 대부분의 대형교회는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 교회를 키우고, ‘세계적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의 대외활동과 컨퍼런스를 지원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고자 내달린다.

 

‘규모’로 대표성을 얻은 가장 대표적 사례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기성교단으로부터 꽤 오랫동안 방언 등을 비롯한 오순절신학 자체에 대한 불인정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세계 최대 교회’란 ‘규모의 논리’로 일찌감치 논란을 압도하고 한국교회 대표성을 스스로 거머쥔 상태이다. 그러나, 대표성을 공공연히 행사하는 순간부터 여러 내부 분란이 대외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국민일보를 넘겨주었던 것이나, 여러 재정적 불투명성으로 인해 한동안 법적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이제 조용기 목사는 교단정치란 복잡한 구조 없이 한 교회의 목사로 한 나라의 교회를 대표하는 지위를 얻어내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시사하였다. ‘포스트-조용기’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단지 순복음교회 목사들 내부의 관심사만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규모의 대표성’은 사실 엄밀히 말해 정치적 정당성이 결여된 대표성이다. 그것은 시장이 선택한 ‘인기’에 불과하다. 그 인기를 손 안에서 확인하는 행위가 ‘사이즈’를 키워가는 일이다. ‘규모 때문에 대표할 수 있다’는 말은 또한 ‘규모가 사라지면 대표성도 사라진다’는 강박증을 남긴다. 국내 기업이 매출규모 순위에 따라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란 소리를 자칭타칭 하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규모의 대표성’은 본질적으로 ‘시장 내 강자’에게 주어지는 공급자 중심의 논리이지 결국 종교적 소비자 신분으로 전락한 구성원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심리는 명품소비 심리와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떤 교회가 이런 방식의 대표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끊임없는 확장을 통한 자기존재증명 외에는 길이 없다. 국내의 대형교회들이 목회 리더십의 세대교체기에 종종 세습 등의 엉뚱한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이 규모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후임 목회자 역시 규모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목회를 몰아가기도 한다.

 

 

‘상징’으로 얻는 대표성

교계정치를 통한 것도 아니고 초대형 교회나 조직을 일군 것도 아닌데, 대표성을 갖는 존재들이 가끔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교회나 목회 구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수행한 어떤 역할로 얻게 된 명예나 존경으로 ‘상징적 자산’을 갖게 된 이들이다.

 

전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그들은 다른 어떤 기반보다도 ‘상징적 대표성’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마더 테레사, 떼제 공동체의 설립자 로제 수사, 대천덕 신부 등을 거쳐 타종교인이지만 법정 스님 등은 어찌보면 단기필마로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이들이다. 7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기독교인들의 이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 시절 가장 엄혹했던 현실에 맨몸으로 투신했었기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복음주의권에도 살펴보면, 독재정권에 의해 해직되었지만 역사학자로 곧은 소리 마다 않았던 이만열 교수가 존경받았고, 꼬장꼬장한 선비 노릇으로 ‘전국민의 윤리선생님’ 역할을 한 손봉호 교수가 주목받은 것은 그 시대에 필요한 역할을 외면하지 않고 감당한 때문이다. 청계천 빈민운동 했던 피눈물 나는 사연 <새벽을 깨우리로다>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진홍 목사가 그랬고, 경실련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면서 시민운동이란 걸 꽃피운 서경석 목사가 그랬다. 한동안 노숙자들 넘쳐나던 시기에는 청량리에서 밥 퍼주던 최일도 목사가 주목 받았다. 시대의 문제들에 온 몸으로 반응한 이들은 그에 값 하는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들의 그늘 아래 주목받지 못한 이름없는 영웅들은 더없이 많았다.

 

이들은 교회를 갖고 무슨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운동한 것이 평가받아 기독교 대표성을 어떤 식으로든 갖게 된 사람들이다. 소위 ‘교계 지도자’들이 갖는 대표성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상징적’ 대표성은 교계나 사회에서 무시 못하게 큰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런 상징적 대표성을 실물로 바꿔보고 싶어할 때 발생한다.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 등 본격 정치운동에 뛰어들면서 자신의 ‘상징적 자산’을 ‘현실정치적 지분’으로 바꾸어냈다. 서경석 목사 역시 꾸준히 그런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지만, 90년대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와 낙선에서부터 꼬인 행보는 아직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표성을 갖고 무엇에 쓰려는가?

요즈음 한국 개신교의 대표성이란 위에서 말한 세가지 층위가 서로 엇물려서 혼재된 상태이다. 각각 ‘정치를 통한 대표성’, ‘시장을 통한 대표성’, ‘상징을 통한 대표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계 정치를 통한 대표성’은 제도적으로는 가장 정당성이 있을지 모르나, 울타리 밖에 훨씬 큰 교회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규모 있는 대표선수’들을 끌어들여야 명실상부한 대표성을 가질 수 있고, 교계만 아니라 ‘대사회적 상징자본’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어야 세상을 향해서도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강박을 갖는다. ‘시장을 통한 대표성’을 갖고 있는 이들은 정작 교계 정치의 기반이 취약하고, 대사회적으로는 ‘제대로 뭘 안 한 덕’에 규모를 키운 경우가 많아, 뒤늦게 ‘뭐라도 해보겠다’는 처지라서 역시 궁하다. ‘상징을 통한 대표성’의 소유자들은 사실 갖고 있는 것은 ‘명분과 대의’뿐 실제로 일을 하려면 늘 조직과 재정의 궁핍에 시달린다. 그러니, 가장 쉬운 방법은 각 대표성의 담지자들간에 상호보완을 하면서, 이심전심 품앗이를 해주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론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다. 대표성을 권력화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서로간에 견제하고, 성찰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랑의교회가 선 지점은 과감히 이 세가지 대표성의 통합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단지 소박하게 “평신도를 깨운다”며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광인의 심정’으로 일깨우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이 실제 교회의 성장으로도 나타났고, 전통적으로 해오던 목회방식과는 다르게 체질개선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제도권 교회들, 교단정치의 문제가 사회적으로도 심각하게 문제되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이것은 교갱협이나 한목협 등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도 아마 교계 연합기구 가운데 가장 내실 있는 단체에 속할 것이다. 이들 연합운동은 ‘최대치 운동’이 아니라 ‘최소치 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조직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해서 교계정치를 주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교계정치가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도록(예를 들면 ‘교회 세습’ 등) 막겠다는 소극적/간접적 참여에 머무는 입장으로 읽혔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이 조직을 발판으로 적극적 교계정치를 시도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오정현 목사로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른다. 다만,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기반해서 보자면, 이미 모든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데, 왜 대표성의 삼위일체 통합을 시도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어 보인다. 즉, 교계정치에서도 역할을 하라는 요구가 있어왔는데, 교회도 규모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데, 대사회적 활동도 많이 수행해서 인지도가 높은데, 이 셋을 통합하여 한국개신교 대표성을 명실상부하게 취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입장이 아닌가 싶다.

 

즉, 옥한흠 목사의 체제에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교회의 건강한 성장에 치중하면서 교계외곽에서의 역할 정도에 머물고자 했던 내적 동기가, 오정현 목사의 체제에서는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커질 수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 더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 더 유력해질 수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 이런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단순히 ‘모른다’. 아마도 그런 면에서 오정현 목사는 억울할 것이다. 그의 ‘순수함(innocence)’은 거짓이 아니다. 그 순수함은 그 단어의 다른 뉘앙스인 ‘무지함’과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거짓이 아니다. 그 ‘자신의 동기 이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즉, 무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순수는 ‘순결한 욕망’ 그 자체의 다른 이름이다. 무언가를 갖고 싶은데, 그것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아이의 욕망만큼 순수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에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거나 ‘진정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이대는 것은 별반 의미가 없다.

 

다만, 한 세대 앞선 선배 신앙인들이 굳이 세가지 서로 다른 대표성의 층위를 통합적으로 쟁취하지 않고, 상호 긴장하고, 보완하게 내버려둔 의도를 새삼 살펴보아야 한다. 단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대표성을 그 정점까지 추구해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 가장 큰 교회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게 하고, 그 교회가 한국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이 땅에 구현하는 바람직한 모습인가를 물어보자는 말이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추구했던 정교일치의 기독교왕국(Christendom)이요, 개신교 교황(Protestant papacy)을 꿈꾸는 행위이다. ‘내가 곧 교회’, ‘내 명예가 곧 기독교의 명예’라고 인식하는 언어가 뜻밖에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점은 무얼 시사하는가?

 

분수에 넘치는 과도한 대표성의 추구는 인정욕구와 결합해서 갈수록 누추해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표성은 의식적으로 추구할수록 멀어진다는 점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천주교인들을 넘어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자리가 갖는 공식성에 오히려 역행하는 탈권력적 면모 때문이었다. 적어도 종교인에게는 그 위치에서 담보되는 권력을 휘두르는 힘보다는 그 힘을 반대역학으로 드러낼 줄 아는 겸손함이 존경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개신교회들에서 보는 대표성의 추구는 오히려 그들의 대표성 결여에 따른 불안감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징후이다.

 


개신교는 대표될 수 있는가?

나는 작년 가을 이래로 종교개혁 정신과 그 이후의 서구문명과 기독교의 상호연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어떻게 개인의 신앙과 이를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데에 적용 가능한 원리를 찾을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정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가장 마음 끌리는 흐름은 종교개혁시기의 에라스무스(Erasmus), 청교도 혁명기의 존 밀턴(John Milton)으로 이어지는 맥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겐 루터의 패기와 결단에 비견할 수 없는 문약하고 우유부단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책을 읽어보면 다르다. 루터적 한계와 문제를 이미 일찍부터 내다본 혜안을 가졌고, 오히려 진영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간 소신 있는 지식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는 끝까지 루터의 종교개혁 진영에 명시적으로 소속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당대의 전형적 의미에서 ‘개신교’(改新敎)는 아니었지만, 매우 분명하게 중세교회와 대조되는 ‘개신교’(個信敎)를 대변할 만한 인물이었다.

 

존 밀턴은 영국 청교도혁명의 와중에 혁명 주체였던 장로파(Presbyterian)와 회중파(Congregationalist)들이 결국 자신들이 싸웠던 그 종교개혁적 가치를 배신하고 권력의지를 발동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국교화 하려 시도하고, 신앙고백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책으로 기울자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수호했던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Christianity)는 교회교(Churchianity)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론적 개인주의(epistemological individualism)’에 입각해 “한 사람이 각각 교회다(a church of one man)”란 말을 남겼는데, 이는 마치 ‘국회의원이 각각 독립된 입법기관’이란 선언만큼이나 개신교 신앙의 정수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개신교 정신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이란 점을 인정해야 한다. 각 성도만이 자신의 신앙을 대표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는 구원받은 자에게 은혜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공동체에 대한 많은 강조는 이런 의미의 고양된 공동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고, 단지 ‘집단주의’를 치장하는 공허하고, 현실과 괴리된 언어로 전락하고 있다. 집단주의적 공동체 이해의 고전적 버전이 바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개신교가 그렇게 싸웠던 중세교회의 구호였음을 상기하라.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대표성이란 것은 결국 성도 각자로 하여금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신앙고백을 천명하고, 그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고, 격동하는 공동체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그러나 잠정적인 호칭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제도로 취득할 수 없고, 규모가 크다고 얻는 것도 아니고, 상징적 존재에게 투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성 논의는 해가면 할수록, 결핍과 결여를 되새김질하는 시도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오늘 우리에게는 이 땅의 일상을 평범한 얼굴로 살아내는 ‘세속성자(secular saint)’들의 불현듯한 도래를 갈망하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대만이 가능할 뿐이다.

 

 

 

* 위 글은 월간 '복음과 상황' 2010년 5월호 특집 "사랑의교회를 다시 생각한다"에 기고된 글입니다.

Posted by erasmus
묵상2010.03.29 12:02

Cristo_crucificado by Velasquez




1.
고난주간 월요일이다.

교회에서 새벽사경회를 갖는다하여 아이들 둘과 아내와 함께 새벽에 나와 앉았다. 
중1, 초2짜리 녀석들이 대견하게 잘 따라붙어준다.

설교는 간결하였으나 기도는 간절하였다. 
온 가족들의 형편과 안위를 아뢰고 새기는 와중에도 이 형편없는 나라에 사느라 고생인 사람들이 떠오른다. 
바다 밑에 갇혀 숨을 조여가는 젊은이들 생각하면 내 호흡이 가쁘다.

2.
오늘 설교 본문은 마27:26-31이었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란 제목은 처음부터 "우리 모두가 그랬습니다"란 답을 기대하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의로운 자를 무고한 죽음에 이르게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또한 의로움은 언제나 반체제적이기에 이렇게 죽임당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다만 우리들에게 남겨진 바는 그 죽음에 어떠한 태도로 임할 것이냐에 집약된다.

빌라도의 반응과 바라바의 반응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이 자신에 대한 대리희생이란 점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빌라도는 사형선고후 자신의 면책을 상기시키며 손을 씻는다.
빌라도에게 예수는 자신의 죄, 죄책, 책임을 전가시킬 대상이었다. 
 
바라바는 좀더 직설적 의미에서 예수를 자신의 대리희생으로 여겼을 것이다.
예수가 죽는 대신 바라바는 풀려났으니 말이다. 
그가 흉악범 강도였는지,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성경도 거기에 별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 않다.


3.
죄의식 혹은 죄책감은 흔히 부정적 감정으로 간주되고, 그 자체가 극복되어야할 대상으로 지목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그 죄(의식)에서 자유케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멘으로 답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정말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 정통스런 고백에서, 가장 반기독교적인 어떤 것을 느낀다.

예수의 대리희생이 대속적(redeeming & atoning death)일 수 있는 것은 
내 죄를 예수에게 전가하고, 그가 고생해서, 죽음으로 다 갚았으니 난 이제 자유인이란 얘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마 역사상 가장 대표적 그리스도인으로 본디오 빌라도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죄를 전가함으로 자신의 죄책에 대해 손을 씻은 사람 아닌가? 
바라바는 예수 덕에 죽음의 문턱에서 운 좋게 살아난 것 아닌가? (바라바가 회개하고 예수의 도를 따랐다는 이야기는 야사로, 소설로만 전한다)

종종 사람들은 예수 덕에 오늘의 내가 있노라고 눈물을 뚝뚝 흘려 간증한다. 
예수의 대리희생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 생각지 않는가? 
예수는 자신의 대리적, 대속적 죽음을 통해,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죄와 죄책감을 해소하고 전가하는 고리"를 자신에게서 결정적으로 종료시키고 
다시는 누구도 자기 죄의 댓가로 타자를 희생시키는 짓을 하지말게 하려함이 아닌가?

예수의 죽음 앞에 숙연해지는 것은 단지 그로 인해 내 죄 문제를 처리했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니라,
이제 나는 "내 죄를 덮기위해 누구도 희생시키는 삶을 살아선 안되는구나"하는 각오와 결단 앞에 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 십자가의 고백이 개인의 양심을 찌르는 데에서 나아가
정의와 사랑, 희생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윤리를 생성시키는 원동력이다.      

대한민국의 허망한 예수쟁이들은 오늘도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 크신 사랑과 희생 앞에 감상적 눈물을 흘려댄다.

그러나, 그 눈물을 훔치고 돌아서서 다시금 타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신의 잘못을 면피하고,
남을 밟고, 착취하고, 땅의 고통에 귀막고 눈감는 짓을 감행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본디오 빌라도를 최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삼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가 십자가의 원수이다. 

오늘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 사실상 본디오 빌라도의 후예들로 인해,
고난 주간은 슬프고, 슬프고, 깊이 깊이 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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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실 목회자포럼/2010.01.28>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열린 교회"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1.

한국사회의 현재상황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키워드들이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마 소통(疏通)이 아닐까 싶다. 최고 권력자로부터 유치원 아이들까지 한국사회는 소통의 부재를 호소한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오해를 받는다거나, 선의를 구조적으로 왜곡하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언론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종교인 특히 개신교인의 말은 그 값을 잘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은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살펴보고, 한국 개신교가 사회와 소통하고, 교회 내부에서 소통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2.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원래 대화하다란 의미의 라틴어 comunis 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 단어는 공동체(communitas)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 대화하고, 소통하는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욕구발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공동체이든 그것이 건강하게 유지, 발전하기 위해서 필수적 요소란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학자들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매우 복합적인 물음을 일으키는 분야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분야의 연구서를 잠시만 들춰보아도 수십 개의 전문적인 개념정의들을 만날 수 있다. 차배근 교수는 이를 포괄하여 커뮤니케이션이란 생물체들이 기호를 통하여 서로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수신해서 공통된 의미를 수립하고,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 및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다.[1] 다양한 논의를 가능한 종합적으로 담아내어 본다면, 아래의 그림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얻을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발원지(source)가 되는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그것이 개인인지, 집단인지에 따라서, 또한 내부적으로 어떤 동기와 규칙들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세부적 영역이 기다리고 있다. 메시지(message)를 구성하고, 이를 어떤 매체(channel, media)로 실어 보내는지에 따라 전체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크게 다른 결과를 낳게 되고, 고려해야 할 지점이 바뀐다. 개인간의 대화에 적용되는 원리와 매스미디어를 통한 소통에는 고려할 요소와 고민할 범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메시지는 수용자(receiver)에게 전달되고, 최초의 커뮤니케이터가 기대한 어떤 효과(effects)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피드백(feedback)을 통해 최초의 커뮤니케이터에게 전달됨으로써 전체 과정에 제대로 수행되었는지를 평가하고 필요한 교정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모델이다. 실제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전달과정에서 흔히 잡음(noise)이라고 하는 것이 끼어들어서 원래의 메시지를 훼손하기도 하고,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도 수용자에 의해서 거부(reject)되기도 한다. 혹은 전체 과정에서 각 단위마다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시켜주지 못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자체의 실패(failure)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우리가 경험하는 커뮤니케이션 현상이 매우 포괄적인 사건임을 잘 보여주고 있고, 특히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일어나지 않을 때 어느 단계에서 어떤 이유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짚어볼 수 있도록 해준다.


 

3.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놓고 말하는지에 따라 논의의 구조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모델 자체를 신학적 논의의 선상에 올려놓고 파악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도 있다.


1) 하나님의 '자기계시' 

때로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말씀을 들려주신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소통일 것이다. 커뮤니케이터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메시지를 다른 매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자에게 말씀하시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 기록을 꼽을 수 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조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커뮤니케이터가 자신의 뜻을 발하였을 때, 어떤 왜곡이나 부족함이 없이 창조질서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그 결과를 돌아보니(feedback) 만족스러웠다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사례로 꼽을만하다. 


 

2)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창조사건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과 만날 때에는 비록 그것이 직접적 대면일지라도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터가 다른 매개 없이 직접 자신을 드러내거나,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었을지라도, 수용자인 인간의 한계가 소통의 질을 결정한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들은 것이 무엇인지를 미처 다 깨닫지 못하는 제한된 존재이다. 종종 성경의 영웅들은 자신들이 본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우치는 데에 오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선명한 메시지에 반발하거나, 거절하기도 하였고(요나의 경우),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보았다고 참칭하기도 하였다(거짓 선지자들은 본 것 없이, 들은 것 없이 예언하는 자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은 언제나 예외 없이 해석의 문제, 순종의 문제를 동반하고 나타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근본적 층위에서 즉각적으로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는 기독교 신학에 시간의 개념, 종말론적 완성을 요청하게 되고, 인간은 시간 속을 사는 존재, 즉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드러난다는 입장을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에는 때때로 하나님과의 즉각적 소통을 주장하거나, 이를 승인하는 경험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완결된 것으로 여기기 보다는 시간 속에서 제한된 것으로 인식했다. 어느 한 시대, 어떤 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초시간적인 진리를 온전히 담거나 표현할 수 없고, 카이로스적 유효기간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3) 인간과 인간의 소통

성경 전체를 휘감는 드라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간의 어긋남을 지켜보고, 화해와 소통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는 인간 세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는 현실론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속임과 오해가 진정성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준다.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은 어쩌면 끝까지 동질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존중해주는 선에서 합의에 도달한 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현실이었다. 유대인과 헬라인 성도들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종과 노예 사이에도 행복한 결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울 서신의 몇몇 구절들은 성도들 간에 발생한 갈등과 이견이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증폭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인간사이의 소통이 지극히 난제(難題)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여러 모양으로 등장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힘의 논리를 따라, 우세한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압하는 것이다. 근대주의(modernism)는 그것이 종종 이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는 하지만, 사실상 하나의 권력 아래 세상을 통제하는 획일화의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제기한 비판이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권위적으로 다른 모든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식(one voice over all)의 반대편에는 가능한 모든 목소리들이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법(liberating the different voices)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소리를 내지 못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voice for the voiceless)도 근대주의적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어찌 보면 주도적 목소리(dominant voice)가 상실되고, 권위가 무너지는 위태로운 시기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한 극단의 시대가 반대편으로 진자(振子)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현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쪽 극단이 진리는 아니었던 것처럼, 저쪽 극단도 진리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 너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고, 미래에 지나친 낙관을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사이에서 우리의 시간대에 주어진 카이로스적 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을 잘 발휘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을 뿐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하나님의 백성

요한복음1장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창세기1장을 연상시키는 문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또 한번의 가장 완벽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신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말씀(message)이자, 하나님(communicator)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를 따라(channel),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수용자(receiver)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일시되셨고, 구원의 사역을 성취한(effects) 존재로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결코 도달하지 못한 완전한 소통의 모습(해석과 순종)성부와 성자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고, 인간들을 향하여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낮추고, 적용시키는 수용자 중심적 모습(receiver-oriented)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몸소 겪으며, 눈물과 웃음을 함께함으로써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고백은 실재가 된다.

 

커뮤니케이션적 관점에서라면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ing Christ)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following Christ)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얼마나 집중하고, 그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기까지 그를 닮아갈 것인가(imitation of Christ)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그리스도인 개인에 의해 수행될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추구되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온전한 소통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이해와 순종의 제자도를 수행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이런 작업은 시공간의 제한과 인간 자신의 한계로 인해 제약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 내적 존재(sein in der welt)로서의 추구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을 훼방하는 요인들을 끊임없이 걷어내고, 개선하는 일이 교회 공동체의 존재방식 속에는 중요하게 아로새겨져 있어야 마땅하다.


 

4.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에 앞 절의 이해를 포개어 놓고 보면 취약점이 선명히 보이게 된다.

 

1) 말의 값이 떨어졌다

개신교인, 특히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룹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말의 값이 평가절하 되었다는 점이다.[2] 말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크고, 말을 지키려는 노력은 별로 없는 반면에,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기에 나오는 현상이다.[3] 말의 값이 떨어지면, 함량미달의 말을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말들이 동원되는 바람에 말의 인플레이션이 등장한다. 말의 겉치장을 세련되게 하던지, 화사한 언변을 구사하던지, 정말 말로 해결이 안되면 강한 비주얼로 호소하는 방법이 등장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의 천박성을 형식미로 포장해서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을 전형적인 선전선동(propaganda) 이론들 안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대중에게 진리와 진실에 의한 설복이 아니라, 거대함과 화려함과 집단의식에 호소하여 이성적 판단보다 정서적 함몰을 우선시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구사하는 것이 대표적이고, 이것이 오늘날 대형교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런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경향의 대표적 결과가 설교표절이다. 목회자의 설교표절을 경험한 교회의 성도들이 정작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설교의 내용 자체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어딘가에서 갖고 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경험과 예화를 스스로의 기도와 고민의 결과로 포장하고, 그것으로 감정선을 건드리는 연기를 해낸 설교자의 을 더 이상은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진실한 소통의 순간으로 사람들을 초청할 때 응당 걸어야 할 말의 무게에 눈금을 속인 설교자는 설교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이란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저울에 달아보아 미달한 존재가 되고 만다.

 

최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처럼 내면을 응시하는 기도에 관심이 일거나, 지식을 집어삼키는 식의 독서가 아니라, 찬찬히 되새기는 영성적 독서법인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 등이 각광받는 데에는 이렇게 허무한 말 잔치에 지친 심성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단순성의 훈련(discipline of simplicity)에 대한 강조가 리차드 포스터나 로잔운동 같은 복음주의권 내에서 서구의 풍요와 세계의 빈곤에 대한 반성으로 70년대에 이미 제기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오늘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누리느라 30년 전의 지혜를 까먹은 것일 수 있다. 말로는 천리를 쉽게 달릴 수 있다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5:41)하라는 말씀을 받았다. 성 프란시스가 그랬었던가?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꼭 필요하다면 말을 하라


 

2) 말의 길이 트이고 있다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설교 만은 아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소통의 문제는 설교와는 다른 방식의 구도를 갖고 있다. 개신교 교회론은 사제직 독점을 인정하지 않고,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천주교와는 다른 상호소통의 신학을 갖고 있다. 각 교회가 선택한 교회정치 제제가 감독제(episcopalianism)이건, 회중제(congregationalism)이건, 대의제(Presbyterianism)이건 상관없이 성직자와 장로 등은 아래로부터의 선출(election)과 위로부터의 승인(anointing)이란 이중구조를 함께 갖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에 기름을 부으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개방된 언로(言路)의 확보 없이는 민주적 의사결정은 불가능하며, 그것이 없다면 어떤 개신교 정치제도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 논의를 정교화하고, 보완해왔다. 고전적 이론들이 오늘날 그대로 들어맞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더욱 촘촘하고, 공감각(共感覺)적이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요구를 창출하기까지 한다. 개신교적 교회론이 성도들간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상호소통을 위한 다양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대형화된 예배의 일방향적 전달이나 중앙집중식 통제의 일사불란함을 위해 동원되기보다는, 성도들 상호간의 수평적 소통을 긴밀하게 하기 위해 집중 투입되는 것이 마땅하다.

 

초대형교회(mega-church)에 대한 논박이 새삼스럽게 등장하고 있다. 분명 크기 자체가 문제가 된다. 스스로 감당 못하는 크기는 개체의 생명을 기형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나는 초대형교회의 존재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 덩치에 걸맞는 존재양식을 형성했느냐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강화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현재 한국사회가 목격하고 있는 온라인 소셜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의 획기적 등장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망을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4] 요즘은 대학 강의실에서도 교수가 설명하면, 웹으로 바로 찾아서 맞고 틀린지를 지적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서로 소통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가르칠 수 있고, 모두가 배우는 존재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변화를 촉발하게 된다. SNS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용경험은 30-40대에서 오히려 많다. 20대 아래는 그런 환경이 일상의 조건이다. 과연 이런 변화는 예배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이며, 설교자에게서 어떤 역할을 기대하게 할 것인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게 될지 기대된다.[5]

 

5.

한국 개신교의 말의 값은 떨어지는데, 한국사회에서 말의 길은 더욱 넓고, 깊게 터져가는 중이라면, 과연 이것은 개신교회에게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일차적으로 위기로 느끼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개교회주의적 체질이 몸에 밴 개신교계에서 공동으로 언론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일반언론들이 반기독교적이란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홍보를 강화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문제가 그렇게 피상적인 것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다. 지금이라도 문제인식의 수준을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고 들어가서 분석을 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낫다. 복음의 핵심 빼고는 다 바꿀 각오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가 가장 폐쇄적인 집단이라고 자조하며 체념하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하나의 목소리로 일사불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다는 것은 명확한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 목소리와 공존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간, 한국 개신교가 가장 치열하게 연마해야 할 자기수행의 장이 거기에 있다고 본다. 다른 의견을 사탄적이라고 정죄하지 않기, 남의 이야기를 시늉이 아니라 진심으로 경청하기,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 말고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하기, 잘못은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고 고치기, 선행을 홍보하기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 중앙무대에 서기보다 주변부를 돕는 숨은 손길 되기, 헌금 내라는 강조보다 선한 일에 헌금 쓰는 데 과감하고 투명하게 집행하기, 학벌, 재산, 권력으로 인한 기득권 인정 안 하기

 

커뮤니케이션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라, 삶의 예술(art of living)이다. 기독교적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아마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투명한 자기헌신에 있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얼마나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할 수 있느냐는 거의 전적으로 얼마나 예수를 열심히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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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블로그 http://post-evangelical.tistory.com 과 싸이월드 클럽 복음주의(http://evangelical.cyworld.com)을 운영하고 있다. 



[1] 차배근, 커뮤니케이션학 개론() (세영사, 1987), 25.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08, 2009년 시행한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지도자, 교인들의 언행 불일치(32.2%)을 가장 많이 꼽았다. 데이비드 키네만, 게이브 라이언, 나쁜 그리스도인(살림, 2007), 56에는 미국의 경우에도 복음주의자들이 위선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함을 보여주고 있다.  

[3]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일반인들과 이혼율, 성경험 비율 등에 별반 차이가 없더라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기성세대의 교육실패로 봐야 할지, 젊은 세대의 표리부동의 결과로 봐야 할지 혹은 새로운 도덕율을 정립해야 할 시점이란 의미인지 논란거리이다.

[4] 스마트폰의 시대를 갑자기 앞당긴 아이폰(Iphone)의 등장, 140자로 전세계와 소통하는 트위터(twitter) 사용인구 증가 등이 당장 일년 내로 몰고올 사회적 행동양식과 일상생활의 변화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5] 소셜미디어에 대한 좋은 입문서로 읽히는 송인혁, 이유진 등이 지은 <모두가 광장에 모이다: 소셜이 바꾸는 멋진 세상>(INU, 2010), 296-299에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예를 들어 미국의 교회들이 소셜미디어에 접근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책의 저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다면 이머징 쳐치(emerging church) 그룹을 비롯해서 훨씬 전향적인 사례들을 많이 발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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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2009.11.30 00:02

점 하나가 가르쳐주는 기독교와 기득교의 차이점 열두 가지






기독교는 세속에서 돌이킨 사람들의 신앙이지만
기득교는 세습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신앙이다

기독교는 가난함을 추구하지만
기득교는 기름짐을 추구한다 

기독교는 꿈을 소중히 여기지만
기득교는 끈을 소중히 여긴다.

기독교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만
기득교는 예스맨과 함께 한다.

기독교는 나의 실수와 허물을 살펴보지만
기득교는 니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기독교는 나를 본받으라고 청하지만
기득교는 니들이 뭘 알아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세상을 향해 당당히 가라고 명하지만
기득교는 세상 속에서 알아서 기라고 충고한다.

기독교는 감사로 넘쳐나지만
기득교는 감시가 끊이지 않는다

기독교는 화평을 원하나
기득교는 회피로 일관한다.

기독교는 사랑과 절제로
기득교는 시기와 질투로

기독교는 마음의 천국을 믿지만
기득교는 미국을 친구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종말을 예비하며 땀흘리는 신앙인데
기득교는 증말 우리를 짜증나게 한다.






* 2005 어간에 황병구 님이 쓰셨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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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인문학2009.09.30 17:01


청어람에서 "미완의 기획, 종교개혁: 2009 한국 개신교와 종교개혁 사상"이란 제목으로 강좌를 운영한다.
홍보물에 넣은 기획취지는 아래와 같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의 개혁 만은 아니었다. 정치-종교-일상이 한 덩어리로 묶여있던 서구 중세의 거대한 질서 전체에 발생한 균열이 몇 세기에 걸쳐 지속되면서 발생한 문명사적 전환의 사건이다. 그 격변의 규모와 파급효과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지금까지 지속되는 현실을 만들어 내었다. 2009년 한국상황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이유는 개신교(Protestantism)의 개신교성(protestant)이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거시적-통시적 안목에서 되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강렬하게 대두하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하는 개혁(reformation)이 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를 상상하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필요 최소한을 재확인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1(10/05) "개신교적 의식의 탄생: 카라바조의 경우" | 상근 교수 (연세대 신학과)

2(10/12) "개신교의 등장과 근대정치의 토대" | 이국운 교수 (한동대 법학부)

3 (10/19) "에라스무스, 인문주의의 이상은 가능한가?"| 강영안 교수 (서강대 철학과)

4(10/26) "루터, 투사-신학자-정치가가 필요하다" | 김주한 교수 (한신대 신학과)

5(11/02) "칼빈은 대체 무얼 꿈꾸었을까?" | 박경수 교수 (장신대 신학과)

6(11/09) "미완의 기획 '종교개혁' 2009년 한국 기독교" | 종합토론

 




생각은 그랬다.

요즘 교회들 꼴이 왜 이 모양인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건사고들을 되짚어가다 보니 언젠가 읽었던 '종교개혁' 관련 책의 내용이 기억이 났다. 종교개혁 시기 중세교회의 면면을 묘사한 내용이 어쩜 요즘 한국 개신교가 욕 먹는 내용과 그리도 흡사한가 싶었다. 교회의 치부, 성직자들의 사생아 출산, 부와 명예의 세습, 관행을 정당화 하는데 동원되는 어용신학 등등... 저 정도면 종교개혁이 일어난단 말이지... 싶었다. 생각이 좀더 진전이 된 것은 이국운 교수 탓이다.



'근대국가의 헌법체계는 개신교 종교개혁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내용을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 월례 세미나에서 발표하던 현장에 내가 있었다. 그곳에 참여한 헌재 연구관들이나 학자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상쾌했다. 물론 그 내용은 여러 모양으로 검토가 필요하다. 나도 헌법논의에 문외한이니, 몇년전의 그 발제문을 내 나름대로 알아먹는데 꽤 시간을 소비한 셈이다. 


여하간, 나는 헌법이란 체제의 탄생에 종교개혁자들의 논의가 깊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근대국가의 정교분리 원칙이나, 관용(tolerance)원칙, 양심과 종교의 자유 등등이 사실은 '세속적 원리'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원리' 특별히 '개신교 정신'에 의해서 추동가능하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헌신을 핑계로 정치사회 영역을 함부로 짓밟는 요즘 한국 개신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어쩌면 개신교 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미묘한 결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단지 단순무식하게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식의 정치밖에는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야 이런 '결을 매만지는 정치' 따위는 턱없는 호사취미 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간다. 종교개혁 시대를 뒤져봐야 한다는 것. 거기에 우리가 못 만난 '길'이 있을 것이란 심증이 점점 깊어진다. 캠브리지의 정치학자인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I)>(한길사) 강독세미나를 지난 여름에 하면서 얼핏 보았던 것도 그것이었다. 아쉽게 르네상스 정치사상을 다룬 1권밖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고, 종교개혁시기 정치사상을 다룬 2권은 아마도 수요부족으로 번역이 요원해 보이지만, 그 그림은 가늠이 된다. 


강좌로 묶어볼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청어람 5년 활동의 결과이다.


종교개혁을 단순히 "예수 열심히 믿자"로 읽지 않고,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 격변으로 추적해서 복원해가려면 적어도 각 영역의 전문가를 마음대로 구사(?)하면서 그림을 그릴 상황이 되어야 한다. 청어람아카데미의 그간 강좌를 통해서 만난 김상근 교수(연세대 신학), 강영안 교수(서강대 철학), 이국운 교수(한동대 법학)는 이런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학자들이고, 문제의식에 바로 접속이 가능한 이들이다. 루터와 칼빈을 발제해주실 김주한 교수(한신대 신학), 박경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은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인연을 맺은 분들인데, 각각 루터와 칼빈 전공이라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번 강사 섭외를 위해 자료 검색을 해보니 딱 적합한 분들이었다. 올해가 칼빈500주년이라 이런저런 학술행사들이 많은 데 박경수 교수는 가장 단골로 불려다니고 있었고, 김주한 교수는 루터를 좀더 폭넓은 배경에서 조명하는 자신의 저술과 여러 번역서를 갖고 있는 분이었다. 덕분에 이번 논의가 신학교와 신학생들에게까지 미쳤으면 좋겠다.  교회개혁을 논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아니, 많다. 



그러나, 이런저런 현장이나 세미나에서 강하게 현실교회를 성토하는 분들의 논지 역시 어느 정도는 어그러진 현실에 대한 반대상(mirror image)에 그칠뿐 그 이상을 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들이 솔직히 자주 있다. 역사로부터 제대로 배운다면 교회를 개혁하자는 이런저런 구상들이 이 얕은 언저리를 이토록 오래 맴돌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이번 강좌를 계기로 삼아 한국교회, 개신교에 관한 나의 생각을 좀더 발전시켜 나가보고자 한다. 

게으르지 않게 글을 이어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원하며... 시작한다.

  



Posted by era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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