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복음주의2009.11.09 11:11

* <복음과상황> 2009년 11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특집기사 중 하나로 쓴 것이라 좀더 세부적인 논의는 다른 분들의 글을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만, 개략적인 지형을 살펴보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창조론진화론’, 변증의 계절이 다시 오고있다

젊은 지구론에서 무신 진화론까지


 


오래 전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a. 160- ca. 220)가 그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신앙의 상징 예루살렘과 지성의 상징 아테네 사이에는 별반 긴밀한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그는 신앙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진리이다란 말까지 했다고 한다. 말로 설명해서 다 알아듣는 것이면 왜 굳이 믿음이 필요하겠냐는 취지였다. 예수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곧 그 사회의 불이익과 차별, 심지어는 처벌까지 끌어내는 상황에서는 신앙이 단순히 이해가 된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죽어도 좋을 진리의 격을 갖추어야 했다는 점을 웅변하는 말이리라.

 

어쨌든 미국의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테르툴리아누스의 입장을 대립주의(Christ against Culture)의 대표로 파악하고 비판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초대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일자무식쟁이가 아니었다. 그 자신 로마의 법률가로 훈련 받았고, 수사학과 철학에 능했던 인물이다. 초기 기독교의 주요한 신학용어와 개념들, 예를 들면, 삼위일체(Trinity) 등을 고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종심급이 무엇인가?

신앙을 최종심급에 놓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시대나 이 최종심급적 지위에 도전하는 대상들의 출현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로마황제란 존재가 지상에서 최고의 헌신과 경배를 강요할 때 이와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국교화란 방식으로 그 갈등이 어쨌든 해소가 되었을 때라야 그 과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론, 그 이후 교회사의 가장 근본적 층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이 교회와 국가(church and the state)란 점에서, 과연 이 땅에서 최종 심급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교회인가, 국가인가란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서구문명사에서 긴 중세의 시기를 지내면서, 사람들이 종교권력이 지식의 영역에서 언제까지나 최종 심급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자 새로운 종류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이성(reason) 대 신앙(faith)이란 구도가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둘 사이를 설명하는데 갈등(conflict) 관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의존해서,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는 최종심급적 주도권에 있었다. 이성을 기반으로 종교현상, 신앙행위를 해명해 낼 수도 있고, 신앙의 맥락 위에 이성의 지위를 배정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르네상스(Renaissance) 이래로 종교개혁(Reformation)을 거쳐, 계몽주의(Enlightenment)로 이어지는 흐름이 이런 굵은 줄기 위에 때마다 여러 세부 요소와 쟁점들을 따라 진행된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때에는 지리적 발견의 놀라움이, 어떤 경우는 천문학과 물리학 등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이론들이, 어떤 경우는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또 어떤 경우는 혁신적인 철학의 등장을 통해 무엇이 세상을 파악하는 최종 심급이 되어야 하는지를 논쟁하며 각축을 벌였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 논쟁이 매우 대중적 양상으로 집약되어 폭발한 주제가 바로 창조론(creationism) 논의라고 볼 수 있다.[1] 그러나, 창조론 논의가 곧 창조(creation) 자체에 대한 논의의 전부는 아니다. 또한, 어떤 창조론에 동의한다고 그것이 곧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창조론들과 진화론들

창조론(creationism)과 진화론(evolutionism)이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을 간략히 묘사하자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젊은 지구론(Young Earth creationism)

2)      오래된 지구론(Old Earth creationism)

3)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4)      유신 진화론(Theistic evolution)

5)      무신 진화론(Atheistic evolution)


 

1) 젊은 지구론

젊은 지구론(Young Earth theory)은 지구의 연대가 오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인데, 이는 성경 창세기의 기록이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를 역으로 추적하면 창조의 기원, 혹은 지구의 연대를 산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일반적인 지질학이나 천문학적 논의와 조화하기 어려운 이 입장은 그런 난제를 성경의 특정한 구절들로부터 암시되는 내용을 통해 풀어보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면, 지구 위에 있던 궁창 위의 물로 인해 보호받던 지구가 그 물이 터짐으로써 급격한 변화와 노화가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오래된 연대로 보인다든지 하는 설명으로 이런 충돌을 해소한다. 탄소 반감기를 이용한 연대측정법도 그런 물리적 대격변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에 지금 과학계에서 사용하는 방법들은 지구의 실제 연대보다 지구의 나이가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본다. 생물의 종은 오랜 시간을 거친 진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의 종 구분 그대로 창조되었다는 입장을 갖는다.


 

2) 오래된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Old Earth theory)은 젊은 지구론에 비해 좀더 과학계의 논의와 조화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창세기의 (yom) 개념은 오늘날의 하루가 아니라, 상당한 장시간을 의미할 수 있다고 봄으로써 천문학이나 지질학적 연대와 조화를 도모하기도 한다. 이들은 창세기의 내용을 가능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나, 현대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문자적 해석을 벗어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 입장은 젊은 지구론 입장으로부터는 충분히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진화론자들에게는 충분히 과학적 증거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 위치에 처한다. 국내에서는 수 년 전 <창조과학회> 초기 핵심 멤버였던 양승훈 교수가 “‘젊은 지구론을 포기하고 오래된 지구론을 수용한다고 발표했을 때, 상당한 반발이 나왔던 것으로 보아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주로 젊은 지구론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의 학술지인 <창조>에는 요즘도 주로 젊은 지구론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공식적으로도 이를 천명하고 있으나 주요한 초창기 멤버들 가운데는 오래된 지구론 혹은 그보다 좀더 전향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이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3) 지적 설계론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비교적 최근의 이론이다. 맥락 상으로는 기존의 창조과학진영의 젊은 세대들이 구태의연한 증거주의 방식의 논증이나, 기존의 과학이론이나 방법론에 소득 없이 싸움을 걸고 있는 창조과학 진영과 구분선을 긋고 새롭게 제기하는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창조과학자들과 구별한다. 이들의 주요 논지는 피조세계 내에서 설계(design)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지적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진화론자들이 견지하는 무작위성(randomness)에 대한 반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지적 설계 논증이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옹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지적 설계자는 기독교의 하나님일수도 있고, 이슬람의 알라라고 불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외계 생물체(alien)일 수도 있다. 지적 설계론은 구체적으로 지구의 탄생, 생물의 창조, 우주의 연대기를 해명하기 보다는 설계자가 존재한다면…”이란 전제를 입증하는데 최대한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전통적인 창조론의 이슈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를 강하게 보이지 않고 있고, 오히려 논의 구도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상황에서는 논쟁을 가르치라(teach the controversy)는 전략으로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진화론만 아니라 지적설계 (혹은 창조론)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도록 강력한 로비를 하고 있어서 종교-교육 문제에 있어 매우 큰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 교육의 일환으로 이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데, 얼마전 좋은교사운동지적설계연구회 간의 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다. 진화론과 지적설계가 함께 가르쳐질 수 있다는 사회적 기반이 확립된다면 그 다음 단계로 기독교 신앙인들이 그 위에서 기존의 창조론 논의들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비판자들에게서 제기된다.


 

4) 유신 진화론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국내에서는 공적인 존재감이 별로 없었지만, 사실상은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층을 갖고 있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의 경우도 가톨릭교회를 비롯하여 성공회, 미국 연합감리교단 등 상당히 많은 주류 교단교파들이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생명과 우주의 발생에 대해서는 진화론적 설명을 수용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절충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유신진화론 입장이라고 할 때,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짚어볼 부분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유신진화의 가장 대표적 표현이 하나님은 창조하셨으나, (진화의 규칙에 따라 세계가 운영되도록)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이신론(Deism)으로 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진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꼭 이렇게 멀리 있는 신(the distant God)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 철학과 신학 전통에서 창조하시고, 관여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에 확실히 서면서도 창조과학보다 진화론에 훨씬 수용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강영안 교수 같은 이는 지적하기도 한다.[2]

 

, 진화론적 설명이 충분한 해명이 되기 때문에 수용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기존의 창조과학류의 설명이 현저히 신빙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는 진화론이 좀더 나은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잠정적 동의 수준에서 유신진화론을 인정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자연과학을 하고 있는 경우나 인문학적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이들이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신진화론의 경우는 이렇게 유보적 입장에서, 적극적 입장까지 스펙트럼의 차이가 있는 노선들을 함께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본주의-복음주의자 진영에서는 신학자 워필드(BB Warfield),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도 이런 입장을 표한 바 있다.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에 대해 비판서를 두 권이나 낸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의 경우도 그 자신 분자생물학 박사에서 신학자로 전직한 이력의 연장선 상에서 도킨스의 근본주의적 과학관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 진화론 자체를 전면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책임자였던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역시 진화론이 곧 무신론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캠브리지의 물리학 교수에서 신학자로 변신한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역시 유신론 신앙과 진화 현상은 조화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국내에 가장 신뢰할만한 복음주의 목회자-신학자인 존 스토트 역시 인간진화를 인정하는 데에 별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로마서 강해>에는 아담을 원시인류로 보는 입장을 포함하고 있는데, 국내 번역에서 이런 내용이 일으킬 파장을 고심한 듯 긴 역자 주가 붙어서 한국 독자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5) 무신 진화론

무신진화론(Atheistic evolution)은 글자 그대로 진화론은 무신론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는 입장, 혹은 진화론은 굳이 유신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자가 적극적인 무신론이라면, 후자는 소극적 무신론이 되겠다. 전자의 경우는 진화 현상은 무신론과 논리적 정합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과학적으로 받을만한 진리라고 보기 때문에 유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의 수립을 훼방하는 퇴행적 행위로 비치기 십상이다. 도킨스 같은 이가 종교, 혹은 기독교는 인류문명에 해악을 끼치는 바이러스로 간주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포이어바하(L. Feuerbach)의 기독교 비판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굳이 유신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후자의 온건한 입장은 종교가 종종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좋은 역할도 꽤 하는 만큼 유용하게 활용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는 일종의 이원론적 입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장 자크 루소(J.J. Rousseau)를 비롯한 서구의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보여주었던 이런 입장은 진화생물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통섭의 저자 E. O. 윌슨(Wilson)은 기독교인들이 지구환경을 살리는데 파트너로 함께 하자는 비교적 우호적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3] 이런 실용적 이유에서의 유신론 인정이 무신진화론자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 다원적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공공의 평화를 위해 협력하고 연대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 관계가 기독인들이 자신들의 과학에 대한 입장 수립이 별로 긴급하지 않다고 오판하게 만드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변증의 계절이 왔다

한국사회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신론자라고 하면 신에 대한 관념(혹은 관심)이 없는 사람 정도로 간주할 수가 있었다. 전도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능숙한 논리로 반대논증을 전개할 수 있었고, 자주 논쟁을 압도하거나, 논의를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의 무신론자들은 이론적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교리적 논란과 빈틈을 잘 알고 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같은 책들 탓이다. 공격과 수비가 바뀐 지 오래이다. 이제 한국사회에는 다시금 변증(apology)의 시대가 오고 있는 듯하다. 변증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을 아는 것. 대체, 창조-진화 논쟁, 과학과 신앙 논쟁의 쟁점들은 무엇일까,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지게 생겼다.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1] 창조론(creationism)에 대한 유용한 자료는 www.wikipedia.org에서 creationism을 검색하면, 이 논의가 어떤 배경과 갈래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쉽게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글판보다 영문판 쪽 내용이 더 권할 만하다.

[2] 강영안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IVP, 2007)에서 사도신경 첫 줄을 강해하면서 창조과학과 지적설계가 오히려 창조에 대해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다.

[3] 윌슨의 경우, 스스로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명확히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어서 유신진화론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으나 대표적인 진화생물학자의 한 사람이기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반대로 또 다른 진화생물학자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의 경우는 큰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회복하면서도 병상에서의 회심을 거부하고, 지인들의 기도의 효력을 부정하는 등 무신론자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인 바 있다

Posted by erasmu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