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인문학2009.10.25 16:23

* 일상생활연구소 회보 <Seize Life>(2009. 08 통권 제3호)에 실은 글입니다. '일상생활 신학'을 소개한 폴 스티븐스 교수의 방한 세미나(2009.10.24)에서도 발표되었습니다. 



 

평신도에게 신학을 돌려주라!

신학교 체제의 극복을 위한 하나의 제안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개신교 성직주의(Protestant clericalism?)

오늘날 한국개신교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내부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흥미롭게도 그것이 본질적으로 개신교성(改新敎性) 그 자체에 대한 위반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중세교회를 향해 항의했던 이들 (the protestant)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천주교보다 더 강하고 무비판적인 성직주의(clericalism) 성향을 종종 드러내곤 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개신교 성직주의는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옹호논리를 만들어낸다. 첫째는 목회자 직분의 전문성이다. 목회자들은 전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경험적, 학문적 훈련을 거쳤기에 목회자의 입장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회의 전문가일수는 있어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만능 전문가최종 심급의 판단자는 될 수 없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심화된 이해에 근거하지 않은 목회자들의 섣부른 입장표명은 오히려 집단 이기주의의 발현이나 이해당사자의 일방적 강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명백히 목회자의 과잉대표성(over-representation) 문제를 낳게 되는 바,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묵살하는 옳지 못한 행위이다.

 

둘째는 현실적으로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부족(theological illiteracy)을 꼽을 수 있다. 평신도들이 삶과 신앙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건강하지 않은 계급주의를 낳는다. 신학적 소양 부족은 소양을 키움으로써 해소해야 할 문제이지, 이를 당연시함으로써 이원화된 계급구조를 방치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켜놓는 오류를 버젓이 범하는 것이다. 평신도들도 적절한 신학공부를 해야 한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한다면 기독교적 공부 (Christian Studies)를 해야 한다. 그 공부의 내용은 전형적 분과 체제로 이루어진 신학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학문 분야를 기독교적 관심 아래 조망하면서 추구하고, 시도해야 할 기독교적 공부하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교 체제의 실패와 대안 아카데미들

문제는 현재 우리의 현실이 이런 방식의 공부하기를 별로 권장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런 역할을 해야 할 신학교(seminary)교단 목회자 양성소로서의 정체성에 너무 깊이 함몰되어 있다. 상당수의 국내 신학교는 교단신학이란 울타리가 금기와 허용의 잣대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는 신학자들의 자기검열로 이어지면서, 신학교가 과감한 지식생산의 근거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지 교단신학의 수호자에 머물게 한다. 신학생들은 그 와중에 목회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기술을 습득하느라 안팎으로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단 목회자 양성에 전념하느라 신학교 체제는 신학교 바깥, 목회 바깥의 세계에 필요한 신학적 지원에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닌 것이다. 삶의 정황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답하는 신학(theology on demand)는 신학교 상황에서는 우선순위가 한참 뒤쳐진다. 평신도들은 그 한없는 유보에 이제 지치고,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학교 체제가 변화하거나, 새로운 대안적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이 질문은 영원히 유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신학교의 교육과 성도들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균열이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나 허용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근 한국의 지식사회나 출판계에서 형성되는 기독교에 대한 비호감 정서나 집요한 기독교 비판담론 등에 신학교 체제가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제대로 된 대답을 만드는데 실패한다면 다른 곳에서 대안을 구해야 하겠다든지, 직접 대안을 만들겠다는 자구 노력이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청어람 아카데미를 기획 운영하면서 발견한 소망스런 현실은 그래도 아직 한국 기독교 내에 기독 지성인이라 분류할만한 젊은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해묵은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몸짓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는 저변이 깡그리 사라진 것은 아니더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공부하기에 대한 관심은 점점 대중적으로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대학원 이상 재학중인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만만치 않고, 이들은 기독교적 공부의 필요는 느끼되, 이를 위해 활용할 어떤 지적 자원도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소위 재야의 지식권력이란 평을 얻고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성공모델은 자주 벤치마킹 되는 대상이다.

 

기독교권을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들로 청어람 아카데미, 기독청년 아카데미, 현대기독교 아카데미 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런 바탕 위에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 여러 갈래로 생기고 있다. 여러 신학교 교수진이 참여하고 있는 바른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회, 주로 기독 대학원생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있는 아볼로 포럼(Apollos Forum), 매년 여름 소장연구자들에게 전공 영역 연구논문의 발표 기회를 마련하고 있는 기독소장연구자 컨퍼런스(청어람아카데미, 한동대 학문과신앙연구소, IVF 복음주의연구소 공동주최), 자생적 연구자 모임을 결성한 집단지성의 실험실 카이로스(CAIROS) 등 상당히 생동감 있는 모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남겨진 질문과 과제

남은 몇 가지 질문은 이것이다. 첫째, 기독교적 공부를 위한 기관(institution)은 가능한가? 이것은 이론적 질문이면서, 실천적 질문이다. 기존의 기독교 대학()의 이론적 토대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런 기관들이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었는지도 평가해보아야 한다. 예전의 미션 스쿨들은 기독교적 공부하기의 독특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있는지 보아야 하겠고, 최근의 기독교 대학들은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적-지성적 성취에 있어 객관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놓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아카데미 운동들은 비제도권교육(non-institutional education)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장점과 더불어 지속성이나 깊이의 문제 등에 구조적 약점이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좀더 과감한 대안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둘째, 새로운 기관(institution)이 필요한가, 새로운 커리큘럼(curriculum)이 필요한가? 교육이 꼭 제도적 기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홈스쿨링 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문제를 제도와 기관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커리큘럼을 보급함으로써 풀어가는 경우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과제는 어느 방식으로 푸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 보아야 한다. 이미 국내외로 기독교 교육기관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우세하지만, 지금 논의되는 기독교적 공부하기를 제대로 수행할 제도권의 기반은 매우 취약한 것으로 판단되기에 선도적 기관의 설립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조만간 있게 될 고등 교육기관 간의 통폐합은 사실상 새로운 방향의 교육모델을 누가 세우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 흐름의 형성을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를 마다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셋째, 새로운 운동을 감당할 역량(capability)이 있는가? 기존의 신학교 체제가 감당 못하는 과제를 수행하려면 그에 걸맞는 학자와 운동가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들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 혹은 통섭(conscilience)적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하고, 신앙적 소양뿐 아니라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최근의 여러 아카데미 운동들 속에서 중견 학자들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소장 연구자들이 커올라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꿰어서 보물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자원들을 다시 한국 대학사회의 숨막히는 관료주의와 실적 경쟁으로 내몰고 말 것이다. 국제적 학문의 장에서 좋은 평을 얻는 기독 학자들을 우리는 어느 정도 확보를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학교를 만들 것이 아니라, 신학자의 수가 1/3-1/2를 넘지 않도록 하고, 인문-사회과학, 문화예술, 교육 등의 영역에 연구 능력을 갖춘 좋은 기독교 학자들이 포진된 학교를 대안적 모델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의 마무리

최근 미국여행을 다녀오면서 몇 권의 책을 샀다. 헌책방에서 핸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 <평신도신학(A Theology of the Laity)>(1958)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구입했다. 평신도의 재발견은 종교개혁이래 참으로 오랫동안 유보된 관심사이다. 아니, 그것은 유보라기보다는 억눌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주의의 폐해가 증가하면 할수록 종교개혁의 잊혀진 슬로건 중 하나인 만인제사장(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이론은 집요하고도 강력하게 재등장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사상운동적 기반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를 추적해본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몇 개의 아카데미를 만나게 된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Geneva Academy), 경건주의자들의 교육을 담당한 할레대학(Halle University) 등 한 시대를 지탱하고, 다음 시대를 열어젖힌 모든 운동들은 그 자체의 연구와 교육을 위한 기관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바로 그런 기관이다. 현재의 신학교 체제는 점점 더 자생적 지식생산에 실패한 직업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있고, 그 추락을 막고자 하는 노력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압도적 필요와 요청에 비해 제도권의 대응은 그야말로 생색내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 그 결과는 한국교회가 점점 더 개신교성 자체를 잃어가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이런 진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용기와 과감한 실천뿐이 아니겠는가?

 

 

 

Posted by era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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