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2012.05.31 05:19

다큐멘터리 "If A Tree Falls: A Story of the Earth Liberation Front"




0.

[급진주의자를 위한 영화보기] 정도로 타이틀을 달고 영화를 몇 편 소개할까 한다. 


미국 와서 좋은 것 중 하나는, 한국서 보지 못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것. 물론, 찾아보면 이리저리 구할 길이 있는 것들이었겠지만, 시간과 기회가 확보되면 아무래도 평소 들여다 보지 못했던 영역을 넘어가 보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듯하다. 


평소 영화를 볼 때, 즐겨 찾는 아마존에서 흥미롭다 싶은 다큐들을 쭉 골라가다가 이 영화/다큐를 접하게 되었다. 일단, 예고편에서 상당히 임팩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보고 싶게 만든다. 이런 얘기이다.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생태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십 건의 방화를 일으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이들은 미국 내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테러조직이 되었다."




1.

일단, 이 영화가 다루는 시기는 1995년에서 2005년 사이 시기이다. 대규모 벌목이 행해지고, 무분별한 생태파괴가 자행되는 것을 보고 있던 일단의 생태주의자들, 환경운동가들 가운데 시위와 로비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여기에는 경찰의 어이없는 강경진압으로 인한 분노도 한 몫했다. 시위자들 눈에 겨자나 고춧가루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바지를 잘라내고 몸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장면은 '허걱' 했다.) '인명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시설만 파괴시키는' 방화를 운동의 전략으로으로 채택한 그룹이 등장한다. 


이들은 수년에 걸쳐 벌목을 위해 건설한 시설물, 목재공장, 대학의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연구실 등 수십건의 시설물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대변인을 통해 자신들이 그 행위의 주체임을 알렸고, 다른 운동가들도 이런 전략에 동참하도록 권유하는 선전물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들은 느슨한 점조직으로 활동했고, 이들을 추종하는 자생적인 점조직이 등장하기도 했다. 몇년간 잡히지 않던 이들은 결국 구성원 중 한명이 노출되면서 줄줄이 검거되었고, 언론은 이들을 '생태-테러리스트', '극단적 환경주의자', '미국 국내 최대의 테러조직' 등으로 불렀다. 


이 다큐는 그 시기 오레곤 주 유진(Eugene, Oregon)에서 벌어진 기업형 벌목 현장을 자세히 보여주고, 이에 저항했던 생태주의자들, 환경운동가들의 커뮤니티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수백년, 어쩌면 천년이 넘었을 거목을 쓰러뜨리는 벌목 장면이나, 산 몇 개를 완전히 깎어내어 민둥산을 만들어버린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몇몇 평범한 젊은이들이 어떻게 '과격한' 운동가로 변신해가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자신의 지역내 운동가들과 어울리다가, 몇 차례의 시위와 집회를 경험하면서 그들의 관점과 행동전략이 더 과감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이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그 유명한 WTO 반대시위에 참가했던 장면도 등장하는데, 경찰들의 진압과 이들의 저항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언론을 통해서 이때 시위대가 상점과 기물을 마구 파손하는 모습을 간간이 보면서 "저건 대체 뭘로 정당화 되는가?" 싶었는데, 이 다큐에서 그 상황의 전후맥락을 좀더 넓게 볼 수 있었다. 

 

이 그룹은 결국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대로 형이 확정되면, 최소 30년 내지는 평생을 감옥에서 살게될 상황이었다. 조직원들이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혐의 입증을 돕기로 하면서 타협(plea bargaining)이 이루어진다. 리더는 2007년 투옥되어 7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가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 확실해지고 나서 오히려 그의 여자친구가 그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나, 이 운동의 순간순간 이들이 느낀 고민과 자신들의 소신을 비교적 소상히 드러내는 장면들은 이들을 단순히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이기 힘들게 만든다. 이들이 공격 타겟이 되었던 벌목공이나 수사관들 가운데도 일정 정도 이들의 생각을 동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들의 방법론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별도로 이들이 다루는 사안 자체는 어쨌든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2.

이 다큐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상당히 묵직한 것들인데...


첫째, 사회운동에서 '폭력'의 사용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혹은 어느 수준까지 정당화 되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이다.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사실상 합법적 논의과정을 '촉진'시키고자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여기서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압박(pressure)을 가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합법적인 실정법 테두리 안에서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운동은 그 경계선 상에 서거나 경계선을 넘어가게 된다. 이쯤 오게 되면, 합법성이 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정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혹은 합법의 경계를 확장하게 하는 이슈를 다루는 것이 언제나 법의 테두리 안쪽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로 부터 올 수도 있다.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을 불러일으킨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보라. 그것은 부당한 법을 어기는 위반행위로부터 시작했다.)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모든 운동은 결국 이 문제에 부딛치게 되어 있다. 어쩌면 국가가 배타적으로 갖고 있는 특성이 '합법적 무력사용'인 한, 이것은 결국 국가의 권능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모든 움직임이 궁극적으로 갖게 되는 긴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시민운동이 사회적으로 마련된 합법성과 정당성의 범주 안에서 이 내부적 합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잘 기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떤 문제들은 바로 그 체제 자체인 경우도 있다. 이 순간을 위한 '운동론'은 과연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이런 질문은 조금 확장하면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수많은 국가 내부의 반정부운동과도 연결되는 질문이고 (한국도 이 집요한 질문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랍권과 서방의 테러리즘 논의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은 이런 질문과 연결된다. 혁명에 대한 질문이 다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미국 땅에서 '환경보호' 운동가들을 통해서 다시 일깨움을 받았다. 어쩌면 좋은가? 



둘째, 아마도 이 다큐를 직접 보지 않고, 주제와 내용을 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을 미친놈들이라 여길 것이다. 아무리 나무나 자연보호가 중요하다지만, 남의 재산이나 기물을 방화하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행동이라고 볼 것이다. 공격대상이 되었던 목재회사 사장도 그렇게 얘기한다. "우리는 나무를 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기도 한다... 우리는 적정한 수준의 활용/개발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를 너무 극단적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이건, 신자유주의 반대이건, 자연파괴 반대이건, 탄산가스 배출 반대이건 간에 국지적이고, 지엽적인 사안을 전면적 반대꺼리로 만들어내는 편협한 운동꾼들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접한다. 한국에서도 도롱뇽 때문에 도로 못 내는 것이 말이 되냐, 땅속 문화재 보호한다고 철도를 못 깐다는 게 말이 되냐, 바위 보호한다고 해군기지를 못 짓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 국립공원이라고 케이블카 설치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소고기 좀 수입하고 자동차 전자제품 팔 수 있는 게 낫지 않냐, 갯벌이나 늪 보호한다고 개발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지하에 핵폐기물 좀 들여놓고 지역경제 살리자는 게 뭐 그리 나쁘냐 등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을테지만, 그 타협점이란 어느 일방(주로 국가나 기업)이 마음씨 좋게 상대편 처지와 공익과 인류의 미래를 헤아려가며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극이 있다. 어떤 권리 침해 행위를 자행할 때에 주도자들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이 구체적이고, 이를 집요하게 추구할 내적 동기와 외부적 역량을 갖고 있다. 반대로 이 침해를 당하는 쪽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거나, 소수가 매우 국지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이들은 잘 조직되어 있지 않으며, 미래를 미리 걱정할 여유가 없고, 이들의 권리행사를 불편하게 만드는 여러 조건들 안에 있다. 싸움으로 치면, 한쪽은 일관된 전략과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화력을 집중하는데 반해, 반대편은 흩어져 있고, 소통과 지휘체계가 없고, 피해양상을 잘게 쪼개어서 이것이 자기 싸움인지 아닌지 계속 갸웃거리게 되어 있고, 이 진영에서 이탈하는 조건으로 나쁘지 않은 조건의 회유를 계속 받는 양상이다. 이런 싸움에 승산이 있겠는가. 이들의 저항은 종종 사회화 되지 못하고, 개인의 불운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패배나 실패를 통해 그 사회는 학습을 하기는 하는 걸까, 어떤 사안은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것이 파괴되도록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셋째, 운동 자체의 불완전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질문도 있다. 이 '지구해방전선'이 붕괴된 원인 중 큰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정보로 잘못된 대상을 공격하면서 생겨났다. 운동가들의 최선의 선의가 오류와 실패로 점철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운동의 대의를 크게 훼손시킨다. 더욱이 그것이 과격한 운동일수록 한번의 실패가 불러오는 문제는 치명적이다. 소수의 헌신된 그룹이 거대한 파급효과를 노리고 무언가를 도모할 때마다 우리는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성공해서 '위대한 혁명가'가 되든가, 실패해서 '어처구니 없는 망상가 집단'이 되고 만다. 우리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되돌아 보면서(retrospective) 어떤 운동의 성패를 평가하곤 한다. 역사적 평가를 할 여유를 갖고 이런 사안을 대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며, 참여 여부를 결정할 것인가? 사람들이 착해서? 리더가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분위기가 친근해서? 위험스럽지 않아서? 똑똑한 사람이 많아서? 사람들이 칭찬하니까, 아니면 반대로 증오하니까? 성공할 것이니까, 아니면 실패할 것이니까?  


나는 우리가 결국은 '불완전한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모한 모험주의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솟구치는 위험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무결점의 완벽함만을 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 우리는 보는 것의 한계가 있고, 아는 것의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벌어지는 일의 전부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채 무언가를 벌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비극이면서도, 희극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가 거기까지라면, 지젝의 표현 마냥, "부정적인 것과 더불어 살기"를 배우는 편이 낫다. 운동가들은 그런 면에서 영웅이 아니라, 인간이다, 최대치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그냥 인간.







Posted by erasmus

티스토리 툴바